팀장은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가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냐며, 앞으로 휴회 관리에 신경 써 주라는 당부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후 경선과 같은 상황에 처한 교사를 통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되었다. 그만두는 학생들이 많아서 몇 명의 수업료는 대신 낼 수 밖에 없었다고. 경선은 이러한 관행이 옳지 않고 결국은 교사들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지만 관리자들이 회사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고했다. 누군가는 손해를 감수해야하는 상황. 세상은 약자 편이 아니다.
토요일 오후, 경선은 마트를 다녀오는 길에 아파트 앞 게시판에서 눈을 고정했다. 마침 바람이 불어 살랑거리는 하나의 전단이 그녀의 발길을 붙잡았다.
“어르신께 책을 읽어드릴 자원봉사자를 모집합니다.
책 한 권의 온기를 전해줄 따뜻한 분을 기다립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인주동 노인복지관.
마치 누군가 그녀를 위해 붙여놓은 것 같아 주변을 살폈다. 가슴이 뛰었다. 책, 이라고 머릿속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책은 자신을 붙들어주는 것 중 하나였고, 그녀 역시 잊지 않으려고 애썼던 버팀목이다. 허탈한 퇴근길, 사람들 사이의 오해, 불면의 밤 속에서도 그녀가 가만히 기댈 수 있었던 세계였다. 경선은 종이를 떼어 전화를 걸었다.
“ 자원봉사니 자격증은 없어도 괜찮아요, 노인들 돌본 경험이 있으면 더욱 좋은데 경험이 있으실까요?.”
경선은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자 한 번 방문하시면 좋겠다고 기분 좋게 이야기했다. 경선은 노트북을 켜고 ‘독서지도사 과정’을 입력했다. 온라인 과정이 몇 달이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 잘 되었다. 일도 하고 있는 상태라 대면수업은 시작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경선은 머뭇거리지 않고 마우스를 클릭해 강좌내용을 살피고는 곧장 ‘수강신청’을 눌렀다. 마감이 한참은 남은 숙제를 일찍 마친 기분이었다.
점심을 간단히 차여 먹고 나서는 등을 대고 바닥에 누워 쉬었다. 딸에게서 보이스톡이 걸려왔다.
응, 딸, 하며 다은을 부르자 술에 취한 다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꼬부라진 발음으로 엄마에게 말을 하니 평소의 무뚝뚝한 느낌은 사라졌다.
" 엄마,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데이비드 알지? "
" 응, 네 새로운 남자친구라고 말했었지, 같은 회사 다닌다고!"
"데이비드가 같이 살재. 하우스 랜털비도 아낄 겸. "
경선은 힘을 삼켰다. 자신이 원하는 답이 있지만 가만히 숨 죽인 채로.
"근데 나 싫다고 했어. 데이비드가 이번 주에 본인 집 애틀랜타로 여행 가자는데, 난 너무 부담스러워. 결혼 생각도 없는데, 동거는 아닌 거 같아"
다은이 먼 곳에서 외로울 텐데 새로운 사람과의 깊은 관계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의아하기도 했고, 젊은 애들이 동거해 보고 결혼한다는 말도 있던데, 딸의 생각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남편과 즐겁게 살아내는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결혼이나 동거에 대해 거부하는 마음이 생긴 건가 그런 생각이 송곳처럼 삐죽 나오는 기분이 들어 침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왜 꼭 같이 살아야 하는지, 난 그냥 혼자 사는 게 좋아. 엄마도 한국에 가있으니 좋지? 꼰데 같은 아빠도 없고.
"다은아, 네가 진짜 살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때 같이 살면 되지. 엄마는 네 마음 존중해. 경선은 딸이 복잡한 속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 어, 하고 듣기만 했다. 가끔은 듣기만 해도 위로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
다은의 취기에 한껏 풀어져버리고 꼬인 목소리와 호흡이 먼 땅에서 그대로 전해지는 기분이 들어 자신도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은은 직장생활과 연애에서 지쳐있는 것 같았다. 한국사회는 공사 구분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과하게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딸에게 사람들과의 거미줄처럼 연결된 그물에서 이탈해 자신을 찾아가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고 말하지 못한 것을 전화를 끊고 후회했다. 중요한 건 자신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모습도 보고 싶기도 했다. 경선은 내 딸, 이라고 저장된 이름을 누르려다 그만두었다. 그런 말조차도 딸에게 부담이 될까 봐. 경선은 자신이 당당하게 독립하는 모습을 다은에게 보여주고 싶어졌다. 언젠가 어디에서 살든 내 딸이 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 자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