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선의 이름으로!(16화 마지막)

by 김작가

복지관에서 창을 통해 햇살이 반짝이자 경선은 자신이 마치 무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책을 꺼내 목을 큼큼 가다듬고 낮은 어조로 읽기 시작했다.


<늙는다는 것> 이해인 수녀

늙는다는 건

화장을 덜 하게 되는 게 아니라

눈물이 많아지는 것이다

어떤 말에도 쉽게 웃고

어떤 말에도 쉽게 아파진다

그러면서 더 너그러워지고

비워내는 법을 배운다.


눈을 감고 듣는 사람들,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소리, 시를 듣는 시간이 낯선 듯 절로 입이 벌어지며 하품을 하는 사람, 경선은 글을 읽다가 흘깃거리며 주변을 살핀다.


“ 어르신들 이해인 수녀님의 시에서 작가는 나이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요?”


작은 소리로 묻자 뒷줄에 앉아 눈을 감고 계시던 어르신이 큰소리로 말한다.


“엉? 뭐라고 하나도 안 들려 크게 다시 말해봐요?”

“아이고 영감탱이, 안 듣고 뭐 했어? 저 노인이 귀가 잘 안 들려 그래 흐흐, 선생님 미안한데 한 번만 더 읽어 줄래요?”


“ 네네, 그럼요, 제가 더 크게 읽어드릴게요!”


경선 자신뿐 아니라 노인들의 목소리에서도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색이 골고루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빨주노초파남보. 처음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잘 마주치고 웃는 일도 어려웠지만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복지관을 나오면 2주 후에는 무슨 시를 읽을까를생각했다. 경선에게 따뜻한 두유를 건네던 김영수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직원에게 슬며시 묻자 그 어르신이 개 데리고 나갔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 다리뼈가 금이 가서 입원했어요,라고 말한다. 몇 주 후에는 두유를 건네던 할아버지의 거친 손에 시 한 편 건네 드리고 싶어졌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빌었다.



집에 도착한 경선이 서랍을 열자 미국영주권 포기 신청서라고 영어로 적힌 종이 뭉치가 든 서류 봉투를 꺼낸다. 서랍을 열 때마다 눈에 거슬렸지만 치워버리지 못한 이유가 있다. 한국에 나온 지 일 년이 돌아오는 시점에 다시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니 생각이 점점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다은은 걱정되지 않았지만 치수는 당연히 돌아오리라 믿고 있을 테다. 그는 미국에서 일궜던 삶들을 함께 지속할 수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딸 다은이 다른 도시로 떠났을 때 치수에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치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교회 신도인 이순미 씨에게 물었을 때도 노후까지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다. 경선은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치수를 따라 가 살던 그 세월 속에선 자신은 늘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군가의 아내였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시간은 없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을 버리는 날들이 많았다.

책을 펼쳐 시를 읽는 이 시간이 경선 자신에게 주어진 첫 번째 '내 이름의 시간'이라는 걸 어르신들의 주름진 웃음 속에서 알게 되었다. 펜 끝이 종이 위를 스친다. 사각사각소리와 함께 이름을 적고 나서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뱉는다. 다 되었다. 수고했다. 눈을 조용히 감고 상상에 빠진다.


“ 어르신들, 오늘은 조금 긴 시 하나 읽어드릴게요. 듣기만 해 주시면 돼요.”


연분홍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말한다.


“이제 진짜 우리 사람이여, 그런 거야? 허허", 선생님 내년에 우리 모두 시 발표회 할 때까지 같이 있자고."


경선은 그 말에 천천히 웃음으로 대신 대답했다.


이제 그녀는 긴 시간을 통과하며 희미한 불빛을 더듬어 찾아내 마침내 자신에게 돌아온 사람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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