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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 Kim Mar 16. 2020

달콤한 내 인생

(부제: 가족과 연 끊기)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사실 지난 2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계셨다. 2018년 9월 경 가벼운 폐렴 증세로 병원에 갔더니 늑막 쪽에 원인 미상의 구조적 변형이 온 것이 발견되었다. 딱히 별다른 치료법도 없다고 하여 그동안 통원치료와 식이요법을 병행해오셨다. 그러던 중 탈수 증세로 다시 입원을 하여 검사를 받았더니 늑막에 악성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병명은 '악성 중피종'. 황급히 대학병원으로 옮겨 조직검사 날짜를 잡았다. 


코로나 19 확산으로 병원은 전쟁터 같았다. 입원실도 없어 겨우 자리가 난 1인 병실로 아버지를 모셨다. 어머니와 형과 함께 앉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논하는 자리에서 불현듯 지난 시절들이 스쳐갔다. 




부모님은 한 마디로 '종교 중독자'셨다. 원래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내가 8살이 되던 해, 보다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한다며 직장을 그만두셨다. 반지하 개척교회의 담임목사를 따라 전국으로 전도를 다니셨다. 생애 처음으로 장만한 주공 아파트까지 그 목사에게 바쳤다. 


몇 년 뒤 그 교회에서는 나왔지만 곧이어 '다락방'이라는 교단에 몸을 담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다락방 산하 신학교에 다니시며 목사 안수까지 받으시고 2009년 충북 음성에 작은 교회를 개척하셨다. 내가 25살 때쯤이었다. 


그동안의 세월이 순탄했을 리가 없었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종교적 우선순위에 밀려 늘 뒷전이었다. 경제적, 정서적, 문화적 결핍이 성장기 내내 나를 괴롭혔다. 학용품이 없어 몽당연필을 볼펜 깍지에 끼워 다니고 달력 뒷면을 스케치북 대신 사용해야 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겨우 중고등학교 수업료를 지원받아 다닐 수 있었지만 종종 끼니를 걸러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경제적 결핍보다 더 컸던 것은 정서적 무관심이었다. 부모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완전히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으셨다. 성장 과정에서 응당 겪게 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나는 부모님께 의존할 수 없었다. 오롯이 나 스스로 기도하고 응답받아 해결하라고 강요받았다. 작은 실수 앞에서는 내가 교만했고 하나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라고 질책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현실을 초월할만한 기도응답을 받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용돈이 없는데 친구가 간식을 사줬다거나, 교회 갈 차비가 없는데 길에서 차를 잡아 탔다거나, 시장에 갔더니 버려둔 야채 더미가 있어서 가져왔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부모님도 당신들의 능력 밖의 일은 기도로 해결 받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만 하시다가 납기일 마지막 날 내 손을 이끌고 은행에 가서 학자금 대출을 받던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래도 부모님과의 관계가 순탄할 수 있었던 것은 나 또한 목회자를 꿈꾸며 부모님과 삶의 방향을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목사로 키우고 싶어 했던 부모님의 바람이 투영된 결과였다. 20대 초반까지는 나도 대학 졸업 후 신학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하며 교회 안팎에서 부모님께 늘 자랑스러운 자식이었다.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아버지가 교회 개척을 위해 음성으로 내려가신 이후부터였다. 나는 수원에 남아 영어학원 강사로 일했고 이어서 학사장교로 3년간 군대에 다녀왔다가 취업을 했다. 5년 정도의 이 기간 동안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정서적으로 조금씩 독립할 수 있었다. 목사가 되려던 꿈도 완전히 포기했다. 


공무원으로 임용이 되면서 5년 만에 부모님이 계시는 음성으로 내려가 잠시 함께 살았다. 아버지의 교회가 아직도 자립하지 못한 상태라 내가 도울 일이 많았다. 부모님은 노골적으로 헌금을 강요하셨다. 결혼 자금을 모아가고 있던 상황에서 부담이 컸지만 개인 용돈을 줄여가면서 최선을 다해 도왔다. 개인 생활비는 별도로 내야 했다.


결혼 전 아내를 처음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날이었다. 조카 셋을 데리고 형네 식구도 참석했다. 음성 집 근처 갈치조림 집이었다. 부모님은 아내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우리 테이블의 갈치마저 떠서 옆 테이블 손주들에게 나눠주었다. 아내의 앞접시는 계속해서 비어 있었다. 무안함에 내가 손수 떠주어야 했다. 


부모님의 관심은 단 하나, 종교뿐이었다. 개인에 관한 질문은 일절 없었지만 남자의 신앙은 여자에게 달려있다면서 앞으로 매일 성경 구절 등을 카톡으로 보내며 아내의 신앙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하셨다. 내가 정색을 하며 말렸다. 어색한 분위기로 식사가 끝났다. 아무도 계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계산을 했다.


집으로 돌아간 아내는 그 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내 마음도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내 사람이 앞으로 겪어야 할 문제였다. 서둘러 신변을 정리하고 음성 집을 떠났다. 아버지 교회에도 발걸음을 끊었다. 부모님껜 냉정하지만 그렇게 해야 옳았다.


몇 년 후 아내와 결혼을 했다. 부모님께는 단 돈 10원도 지원받지 않았다.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다. 결혼식을 마친 후 4개월이 지나도록 내 앞으로 들어온 축의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여러 차례 재촉 끝에 겨우 400만 원을 돌려받았다. 정산 내역을 보니 내 앞으로 600만, 부모님 앞으로 1400만 원이 들어왔고 식대 등 비용으로 600만 원이 지출됐는데 아무래도 부모님은 남은 1400만 원이 전부 당신들 몫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결혼 후에는 최소한의 도리는 하려고 노력했다. 처갓집과 가까이 살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용돈만큼은 양가에 똑같이 드리자고 아내가 먼저 제안했다. 일 년에 서너 차례 명절, 생신 때만 방문하다 보니 결혼 한지 몇 년이 지나도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형네 가족이라도 함께 할 때면 더 심했다. 


두 살 위인 형은 말과 행동이 거친 사람이라 어릴 때부터 같이 있으면 불편했다. 결혼 전 아내와 함께 인사차 한 번 만났는데, 주문을 잘못 받은 아르바이트생을 쥐 잡듯 잡는 모습에 첫인상부터 불쾌함만 남겼다. 집들이를 할 때도 형은 휴지 하나 없이 빈 손으로 와서는 차려 낸 반찬 투정만 하다 갔다. 조산으로 한 달이나 일찍 출산을 하고 2주간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도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능글맞게 웃으며 잘만 연락해왔다. 


어머니는 묘하게도 그런 형을 더 챙기셨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처음 시댁을 방문한 날이었다. 원래는 3시에 약속을 잡았는데 어머니께서 다급하게 1시까지 와달라고 전화를 하셨다. 이바지 음식을 서둘러 찾아 부랴부랴 갔더니 형이 점심을 못 먹어서 일찍 불렀다는 것이다. 밖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며 우리 인사는 받지도 않고 신경질만 내던 형은, 이바지 음식은 사돈댁 것까지 바리바리 싸가지고 돌아갔다. 우리는 아무런 답례 없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형의 유대감은 형이 손주를 셋이나 안겨드린 덕분에 더 돈독해졌다. 지난 10년 넘게 부모님은 주말과 방학 때마다 조카들을 돌봐주셨다. 형도 겉모습과는 달리 뒤에선 살갑게 부모님을 잘 챙기는 모양이었다. 점점 내가 끼어들 자리가 사라져 간다고 느꼈지만, 내심 차라리 잘 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형이 부모님을 챙기는 걸 드러내 놓고 생색내곤 했지만 효도는 셀프, 그저 우리 몫이나 잘 하자는 생각에 애써 모른 척 해왔다. 


아내의 임신, 출산 과정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가족들은 아내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 안부 전화 한 통 없었고 출산 후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병원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임신 중 어머니 생신이라 방문했을 때 웬일로 임부복이라도 사 입으라며 봉투를 주셨다. 그날도 식사는 형네 식구 것까지 우리가 계산했다. 집에 와서 봉투를 열어보니 10만 원이 들어있었다. 


출산일을 한 달 앞두고 어버이 날이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샤부샤부 집이 충주에 있다며 그리로 오라고 하셨다. 천안에서 충주까지는 왕복 4시간이 걸린다. 만삭의 산모가 다녀오기에는 무리니 중간 지점인 안산이나 평택쯤으로 제안을 드렸더니 차라리 천안에서 모이자고 하시기에 좋은 식당을 잡아 식사를 대접했다. 형은 어머니의 뜻을 거역한 동생이 괘씸했는지 식사 내내 투덜거렸다. 부모님도 딱히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날도 천안에서 모인 죄(?)로 우리가 모두 계산해야 했다. 아내는 5월에 한 달이나 일찍 조산을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과연 어디까지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일지 오랫동안 고민해봤지만 딱히 답은 내릴 수 없었다. 그저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하며 최소한의 도리만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억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형과 어머니는 내게 앞으로의 치료비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셨다. 나는 최근 부모님의 경제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 암보험이라도 들어놓은 것이 있는지 물었더니 전혀 없다고 했다. 형은 자신이 실비 보험은 들어드리고 있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당장 구급차 비용이 20만 원 들었다느니, 대학병원 오기 전 하루 입원료만 50만이 들었다느니, 특실은 하루 75만 원이라느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내 사정을 솔직히 말씀드렸다. 치료비가 얼마가 됐든 도와드릴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도움을 드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무조건 1/n으로 분담하자고 주장하던 형은 그 말에 매우 불쾌해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내 휴대폰 번호를 삭제해버리더니 '아예 가족의 연을 끊겠다, 아버지 장례식에도 부르지 않겠다'며 소리 질렀다.


어머니는 내게 그동안 모아둔 돈은 다 어쨌냐고 물으셨다. 그 돈은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한 것이며 이제 겨우 자립했고, 아내의 육아휴직으로 외벌이인 형편에 아직 부모님까지 챙겨드릴 여유는 충분하지 않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도 '그렇다면 치료비도 필요 없고, 앞으로 찾아오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으마, 없는 자식인셈 치마' 하시며 형의 주장에 동참하셨다.


그 후로 날 선 비난의 말들이 내게 쏟아졌다. 나로선 상상도 못 했던 비난들이었다. 5년 전 생활비 액수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다. 결혼 후 드려왔던 용돈도 턱없이 부족했었단다. 이모부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낸 부조 금액도 마음에 안 들었다고 했다. 내 직장 건강보험에 부모님을 피부양자로 등록한 것도 다 내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었단다. 내 결혼식 내내 회개기도를 올리셨다고 한다. 하나님도 부모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좋아 죽는 결혼식이었다며 말이다. 나보고 가족 형제도 모르고 처자식과 처가만 챙기는 이기적인 인간이란다.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 흉을 보면서 내가 아버지의 모습을 꼭 닮은 탓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유산이 있었다면 내가 달리 행동했을 거라고 했다. 낳고 길러준 은혜도 모른다고 비난받았다. 나의 지난 모든 것들이 부정당했다.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는 동안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낳고 키워준 은혜 갚으라고 하는 짐승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말해본들, 부모님의 은혜는 내리사랑으로 자식에게 갚는 법 아니냐고 말해본들, 일반적인 부모라면 자식이 자립하고 입신하여 좋은 배우자 만나 행복한 가정 이루는 것 말고 무얼 더 바라겠냐고 말해본들 아무 소용없을 거란 걸 잘 알았다. 형은 나와 달리 부모님이 학자금 대출을 갚아주셨고, 자식 셋을 10년 넘게 키워주셨고, 사업 자금도 도움받았으니 나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말해본들 아무 소용없을 거란 걸 잘 알았다.


입을 다무니 오히려 놀라우리만큼 감정이 차분해지면서 생각이 맑아졌다. 그들의 비난은 너무나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내가 해명하거나 되돌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성장했거나 아니면 무뎌질 대로 무뎌졌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이 상황이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침묵이 두 사람을 더욱 화나게 한 모양이다. 감정 없는 기계와 이야기하는 것 같다며 비난의 수위를 높여갔다. 두 시간이 넘게 난도질당했다. 인연을 끊기 원한다면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대답했다. 


미련이 남아 굳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들이 어떤 과정,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됐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시냐고... 어머니는 그 말마저 끊고 본인이 해야 할 말이 남았다며 이어가셨다. 몇 년 전에 내가 비판했던 한 목사 얘기를 꺼내며 지금이라도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리곤 나와 연락은 끊더라도 손주 사진은 지금처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최근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실망했던 경험을 얘기하며 나에게도 사람(=아내)을 너무 믿지 말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뒤돌아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밤 새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아내도 가슴 아파하며 나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다음 날 아침 1500만 원을 마련해 송금해주고 그렇게 가족과 인연을 끊었다. 미련은 없다 해도 가슴 한켠이 한동안 아렸다. 


유튜브의 심리상담 관련 영상들이 많은 도움이 됐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일들이 다름 아닌 종교적, 영적, 정서적 학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머니와 형의 상태가 자기애성 인격장애였다는 것,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가족과 연을 끊는 것이 의외로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만 장인, 장모님께는 용서를 구해야 했다. 못난 사위 때문에 소중한 딸이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 이미 아내가 귀띔을 해둬서 두 분도 대충 상황은 알고 계셨다. 송구한 마음을 전하는 나를 오히려 감싸주셨다. 앞으로 평생 마음의 병이 될 텐데 감당할 수 있겠냐며 걱정해주셨다. 성인이 내린 결정이니 믿고 지지한다고 하시며 건강 꼭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다. 정작 친부모님께는 한 번도 이런 위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라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연애시절 극장에서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는데 주인공이 어릴 적 상상 친구였던 '빙봉'을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내는 더 의아해했다. 한동안 좋은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결혼 후 조금씩 그 눈물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내의 말로는 듬직하게만 보였던 오빠가 결혼하고 나니 무기력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아내는 그런 나를 끊임없이 격려해주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장인 장모님께서 보여주시는 아낌없는 사랑도 큰 힘이 되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내면 아이'는 지난 3년간 조금씩 성장해가더니 '빙봉'이 그랬듯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너무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과거에 얽매여있기에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너무나 아깝다. 큰 사건을 겪으며 과거의 굴레를 힘겹게 벗어냈다. 산더미 같은 과제가 쌓여있지만 기분 좋게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나를 위해,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야만 한다. 


- 2020년 2월.



잘 가, 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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