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신과 함께, 비잔틴과 중세 미술(5~6세기)
서양미술사는 이제부터 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란,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는 시점(395년)으로 정치적 분열이 종교적 분열로 이어졌고 이 종교(기독교)가 로마 후기 이후 미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장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훑어보고 지역과 문화적 관점을 중심으로 당시 미술을 정리하고자 한다.
동서 로마의 분열은 단순히 정치적 분열에 그치지 않고, 종교적으로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로 나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미술,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각각의 교회는 독자적인 예술 전통을 발전시켰다.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로마에서 현재의 이스탄불인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수도의 이름 또한 콘스탄티노플로 변경하였고 동로마는 이후 1,100년간을 존속했다. 반면 서로마는 476년 멸망하게 되니 당시 동로마인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정통한 후계자라 여겼으며 스스로를 로마인라 칭하였다. 그러나, 후대 서유럽의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16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형성된 '서유럽 중심주의'는 유럽 중에서도 서유럽 국가들의 문화와 역사적 성과가 우월하고 동유럽 국가들을 상대적으로 하위나 변형된 문화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어, '비잔틴'이라는 용어 또한 동로마는 정통 로마 제국이 아니라는 뜻을 은근히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한 지리적·정치적 구분을 넘어, 동방과 서방의 문화적 차이를 반영한 용어이자 서유럽 중심적 시각이 내포된 역사적 용어라 할 수 있다.
결국, 비잔틴 제국은 서유럽 학자들이 만들어 낸 동로마 제국의 또 다른 이름으로 그 유래는 비잔티움이라는 도시명에서 비롯되었고, 당연히 비잔틴 미술은 동로마 제국의 미술을 일컬으며, 고대 로마의 예술 전통, 초기 기독교 미술, 헬레니즘 미술의 요소들이 혼합되어 탄생한 예술형식이다.
그렇다면, 서로마 붕괴 후 서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어떤 양상을 띠고 있었을까? 4세기 경, 중앙아시아의 훈족에게 내몰린 게르만족은 지금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종국엔 서로마를 멸망시키게 된다. 여러 부족으로 형성된 게르만족의 대표 부족은 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앵글로 색슨족으로 지금의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 지역 등에 터를 잡고 왕국을 형성하여 서로마 제국의 유산과 게르만 전통이 혼합된 독특한 정치 체계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게르만족은 초기에는 다신교를 믿었지만, 로마 제국과의 접촉을 통해 점차 기독교를 받아들여 이후 중세 봉건 체제의 기초를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프랑크족은 5세기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유럽 중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듯 동/서 로마는 모두 로마의 유산을 기반으로 출발하여 동로마는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와 기독교가 더해져 이른바 비잔틴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서로마는 일찍이 게르만족에게 멸망되었으나 로마 교황의 정치력에 힘입어 발 빠르게 게르만족을 포섭함으로써 이들의 토속 문화와 기독교가 혼합된 중세 문화를 열게 된다. 따라서, 양쪽 문화 모두 기독교라는 강력한 종교 권력의 영향 아래, 미술은 성상 제작이나 구약 성경 외의 표현이 금지되는 등 예술적 암흑기를 맞이한다.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야만 했다. 예배 장소를 고대의 신전을 모델로 할 수는 없었다. 사제가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모든 회중(교인)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교도의 신전을 본뜨지 않고 고전기에 '바실리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커다란 집회소 형태를 본뜨게 되었다."_P 133 / Story of Art
"6세기말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많은 신도들이 글을 읽거나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시키려면 이러한 형상들이 마치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에 있는 그림들처럼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막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회화를 옹호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_P 135 / Story of Art
위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바실리카>의 벽면에는 성경 장면과 기독교의 상징이 장대하고 화려한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어 당시 동로마 교회가 어떻게 회화를 활용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제 서유럽과 동로마(비잔틴)의 미술은 공히 가장 큰 권력이 된 '기독교'에게 새로운 관계 설정을 강요받게 되었고 힘이 없는 미술가들은 아무 저항없이 충성 서약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