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나는 여름이 싫다. 더위를 잘 타서인지 땡볕 속을 잠깐 걷고 나도 금방 피곤해지고 뭔가를 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에어컨을 하루 종일 틀고 집에 있기도 눈치 보이기 때문에 바깥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카페나 도서관을 전전해야 한다. 도대체 모기들은 방충망을 어떻게 통과하는 건지 적당히 피만 빨고 가주면 좋으련만, 불을 끄고 누우면 집요하게 귓가에서 세레나데를 속삭여서 예민한 나를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눈에 불을 켜게 만든다.
나에게 여름의 낭만 같은 건 없다. (일단 잘 놀러 가지도 않기 때문에). 하지만 일본의 여름 풍경의 영화들을 보면 이상하게 여름이 기다려진다. 일본의 여름은 청량하며 싱그럽다.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그려내는 여름은 가본 적 없는 고향에 대한 이상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를 ‘일본 여름’ 장르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열차 선로와 차단기,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작은 텃밭의 못생기게 자란 채소들, 평상 위에서 선풍기를 틀며 읽는 만화책, 아이들의 뛰어다니면서 일어나는 모래 바람 같은 것들. 일본의 여름 풍경을 보고 있으면 한여름의 더위도 견딜만하게 느껴진다.
최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여름을 배경으로 한 영화두개를 보았다. <태풍이 지나가고>(2016)와 이번에 다시 본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잔잔한 풍경과 함께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그 사건 이후에도 인물들은 전과 다름없이 평범한 하루를 살아간다.
어떻게 보면 매우 소소한 일상의 사건들은 오히려 엄청난 사고들보다 더욱 마음을 동요시킨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생을 뒤흔들 엄청난 사건보다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순간들이다. 어떤 대화, 표정 같은 것.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의 시간이나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보여주고 싶다”라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끝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일상의 빛나는 순간’이라고도 했다.
민용준, huffpost, <'어느 가족',그렇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물들은 전형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전형적인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인물들은 함부로 낙관하거나 비관하지도 않는다. 정상에서 조금 벗어난 처지의 인간들을 가치판단을 보류한 채로 지켜보게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아이들은 자연스럽다. 인간을 정형화하지 않는 감독답게 그의 영화 속 아이들은 사랑스럽지만 나름대로 내면에 자기 세계를 품고 있다. 어린이를 ‘아이스럽게’ 눙치지 않고, 이야기상의 도구로서가 아닌, 그들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관찰하게 한다. 나는 그의 아이들을 향한 정성스러움, 쉽게 단념하지 않는 태도가 그의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 점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은 명랑하고 천진난만하며 단단하다. 내면이 단단한 사람은 나이가 어리더라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싱고’는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것이 (가정을 제대로 부양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빠의 능력 부족인 것임을 알고 장래희망을 ‘공무원’이라고 말한다. 싱고는 야구를 좋아하지만 그것을 직업으로 가져가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 것임을 일찍이 안다. 엄마와 아빠가 다시 같이 살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엄마가 행복하다면 새아버지가 생겨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생각하고 꽤나 현실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아이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답게도 유행하는 브랜드의 신발을 사주면 좋아하고 로또에 당첨이 돼서 큰집에서 할머니와 엄마와 아빠와 다 함께 살기를 꿈꾼다. 이렇듯 아이들은 어른들 못지않게 혹은 그 보다 더 복잡한 속사정을 갖고 있다.
태풍이 오는 날 싱고와 료타는 공원 놀이기구 안에서 대화를 나눈다.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되고 싶은 사람이 됐어?”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하지만 되고 못되고는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그런 마을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거지.”
“정말?”
“정말이야”
<태풍이 지나가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더 다양한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서 이야기를 힘차게 이끌어간다.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부모가 헤어지고, 가고시마에서 엄마와 할머니 쪽에서 사는 코이치와 후쿠오카에서 아빠와 함께 사는 류노스케가 있다. 코이치는 그의 가족이 다시 다 함께 살기를 염원한다.
코이치가 사는 곳의 사쿠라지마산은 화산재가 계속 올라온다. 코이치는 그 산에서 화산이 터져야 가족이 다시 합쳐져서 오사카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신칸센 고속열차가 맞은편 열차와 동시에 교차하는 지점에서 소원을 빌면 기적을 이뤄준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 돈을 모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한다.
코이치는 동생 류노스케에게 (다른 여자와 만나지 못하도록?) 아빠를 잘 감시하라고 하지만 사실 동생은 가족이 다시 합쳐지는데 별 관심이 없어서 보인다. 류노스케는 아빠를 닮아 자유롭고, 좋아하는 것만을 하며 사는 생활을 즐긴다. 그들이 갈라서기 전 부모의 갈등을 못 견뎠기에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그런대로 받아들인다. 코이치는 그런 동생이 못마땅하다.
하지만 친구들과 같이 여행길에 오르고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코이치는 ‘가족’에서 ‘세계’를 생각하게 된다. 코이치는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열차 앞에서, 기적을 이뤄주는 열차가 지나가는 순간에 소원을 빌지 못한다. 아빠가 말한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아지는 순간이다.
이 여정을 통과하고 한 소녀는 엄마에게 당당히 배우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말하게 되고, 소년은 아끼던 강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표면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여행 이후에 아이들은 달라졌다. 그들은 한 발짝 더 성장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태풍이 지나가고> 자신의 실패한 꿈을 품고 살아가는 (현실적으로 무능력한) 어른들이 나온다. 책을 한 권을 내고 몇 년 동안이나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하는 소설가, 뮤지션의 꿈을 가지고 있지만 돈 버는 데는 관심이 없어 이를 견디다 못한 부인과 이혼을 하게 된 남자, 도쿄에서 배우를 했었지만, 결국엔 고향에서 작은 선술집에서 일하는 여자 등.
그들은 내면에 어떤 이상(혹은 좌절된 이상)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크다. ‘료타’는 소싯적에 문학상을 한번 타고 책 한 권을 냈지만 그뿐. 이후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글하나 써 본 적이 없다. 신문에 실을 만화를 그려보는 게 어떻겠냐는 출판사 직원의 권유에 소설가적 자아의 자존심이 그것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씩 이혼한 전처와 아들을 만나는데 매번 양육비를 준비하지 못하고 은행이 닫았다는 등 둘러대기나 한다.
15년 전 누렸던 지금은 구질구질해져 버린 영광을 되새김질하며 살아가는 료타는 아이까지 있는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제대로 된 일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소설의 취재를 핑계로 흥신소에서 사람들을 속이며 돈을 번다. 그리고 연립주택에 사는 어머니 집에서 돈 될만한 것은 긁어모아 전당포에 팔아버리고 얼마 되지 않는 연금을 얻으려 한다.
뭉클하면서도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료타와 그의 엄마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노래 가사를 들으며 행복에 관하여하는 대화다. 아직 철들지 못하고 허상만을 쫓는 아들에게 엄마는 충고한다.
“… 왜 남자들은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는 건지. 도대체 언제까지 잃어버린 걸 쫓아가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그렇게 살면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은데(…) 행복이란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란다(…) 난 평생 누군가를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무슨 소리야”
“넌 그런 적 있어?”
“...나는 그런대로.”
“없을 거야. 보통사람들은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날마다 즐겁게 그럼, 그런 적 없어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렇게 하루하루를 그래도 즐겁게."
“복잡하군”
“단순해. 인생이란 거 단순해”
<태풍이 지나가고>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건 바다보다도 깊은 사랑이나 불타오르는 대의에 대한 열정만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의 기쁨,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아닐까. 세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타협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건 수치스럽거나 실패한 것이 아니다. 행복은 포기를 인정하는 순간에 온다.
꿈을 품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옳은 방향은 없다.
매일 똑같아서 변하지 않는것 같은 일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그의 영화는 마법같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도 필요하지. 전부 의미 있는 것만 있어봐. 숨 막혀서 못살아.”
"쓸모없는 것만 있으면 안 되잖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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