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망치소리」 요시다 다이하치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
『인견 실격』으로 잘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들에는 그 시절 일본의 동시대의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퇴폐성, 탐미주의, 허무주의 등이 깊게 담겨있다. 인간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그것을 최대한의 섬세함으로 그려내기에 일본의 문학은 내면과 불화를 겪는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는다. 나 또한 대학생 시절, 거의 중학교 2학년 때의 사춘기 못지않은 (일종의 대 2병?) 내면의 격변의 시기를 겪으며 다자이 오사무와 일본 문학과 함께 그 시기를 지나왔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들을 장편 못지않게, 혹은 더 좋아한다. 그중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단편집 『굿바이』 2010에 수록돼 있는 <망치소리>(1947)이다. (일본어 원문에는 ’따앙땅땅’이라고 쓰여 있다. 판본에 따라 ‘따앙땅땅’ 혹은 ‘탕탕탕’으로 번역한다. 본 글에선 편의상 ’탕탕탕’으로 통일한다). 소설은 서간문 형식으로 화자가 어떤 작가 (다자이 오사무 그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고 작가의 답변 편지로 마무리가 된다.
우체국 창구에서 일하는 스물여섯 살 청년이 한 작가에게 편지를 쓴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군에 징집되어 해안 경비대에서 4년 동안 일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그의 부대에 있던 장관은 천황에게 사죄하기 위해 자결을 결심한다. 그 엄숙한 공기 속에서 그는 비장한 분위기를 깨는, 예의 그 망치 소리를 듣는다. ‘탕탕탕’ 그 순간 그는 어떤 막에 쌓인 것처럼 멍해진다.
그 사건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은 어떤 일도 열정적으로 하지 못한다. 뭔가를 의욕을 가지고 시작해도 그 망치소리가 들려오면 모든 게 ‘소용없음’의 감정으로 귀결되어 버리는 것이다.
"(…) 무슨 일에 감격하여 불끈하려 해도 어디선가 희미하게 탕탕탕하고 그 쇠망치 소리가 들려와, 그 순간 저는 꿈에서 깨어난 듯 눈앞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버려, 마치 영사기가 끊기고는 그저 하얀 스크린만이 남은 것처럼,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듯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허탈하고 바보 같은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기이한 현상으로 인해 쓰던 소설도 유치하고 시시하게 느껴져 완성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마음에 품어 두고 있던 여인과의 만남에서는 망치소리를 듣고는 돌연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려 관심을 끄게 된다. 하루는 아오모리에서 활기가 넘치는 지방 노동자들의 데모를 보고 인생의 한줄기 빛을 찾은 듯 감정이 격양됨을 느끼고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역시 멀리서 망치소리가 들려오고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도대체 저 소리는 무엇일까요. 허무라는 이름으로 쉽게 치워버릴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 탕탕탕하는 환청은 허무마저도 허물어뜨립니다.”
여름이 되어 지방 청년들 사이에서 스포츠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남자들은 씨름, 달리기 등을 한다. 한 청년이 가엾어 보일 정도로 아무런 보상도, 훈장도 받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걸고 임하는 모습을 보고 그 순수한 열정에 크게 감화된다.
거의 ‘허무의 정열’처럼 보이는 이 마라톤이 그의 공허했던 마음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느끼고, 그는 동료와 운동을 시작하지만 상쾌함을 느낀 그 순간.. 역시 ‘탕탕탕’. ‘허무의 정열’조차도 무너뜨리는 망치소리는 점점 잦아지고 자살을 생각해도 탕탕탕,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탕탕탕..
니힐리즘마저도 깨부수는 저 탕탕탕 소리는. 패전 이후 모든 것이 실패, 무의미로 돌아가버린 시대적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넓게 퍼져 있던 허무주의를 잘 드러낸다. 이런 허무에도 불구하고 아니 허무마저 깨부수는 무기력함에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2013에서 키리시마는 배구부 에이스이고 예쁜 여자 친구를 두고 있으며 학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돌연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고 잠적해 버린다. 갑자스런 그의 잠수는 그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하지만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키리시마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키리시마의 부재로 혼란에 빠진 아이들 속에서 그의 친구인 히로키는 줄곧 이 모든 사건들 속에서 가장 의연하다. 키리시마의 수비수 자리를 채우기 위해 키가 작은 학생은 부단히 노력하지만 타고난 재능의 산을 넘을 수 없고. 히로키가 속한 야구부의 선배는 동아리 활동이 입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어느 곳에서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지 못했지만 ‘신입 선발 전 까지만’이라고 하며 야구 연습에 밤낮으로 매진한다. 그리고 영화부의 마에다는 선생의 반대에도 막무가내로 자신이 쓴 각본으로, 지저분한 필름 카메라를 들고 좀비 영화를 찍으러 다닌다.
‘난 놈은 뭘 해도 되고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된다.’라고 말하는 히로키다. 즉, 이길 수 없는 승부엔 애초엔 걸지 않는다. 그런 그의 앞에 될 것 같지 않은 승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줄곧 고고하던 그의 내면에 어떤 흔들림이 생겨난다. 이들은 왜 이렇게 열심인 걸까? 동아리 활동이 입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데, 친구를 기다리며 하던 농구도 이제는 그저 시간낭비처럼 느껴지는데, 이들은 왜 이렇게 열정적인 거지?
영화의 후반부에 키리시마를 찾기 위한 배구부와 촬영을 하던 영화부의 큰 소동 후에, 히로키는 필름 카메라로 장난스럽게 마에다를 찍으면서 묻는다.
여배우랑 결혼할 건가요? 아카데미 수상도 하나요?
뭐 그럴 일은 없으려나.
응?
영화감독은 무리야.
그럼, 어째서 이런 지저분한 카메라로 굳이 영화를 찍는 거야?
아주 가끔씩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랑 지금 우리가 찍는 영화가 연결됐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 정말 아주 가끔이지만, 그게 그냥 좋으니까.
그리고 마에다는 카메라를 뺏어 들어 히로키를 촬영한다. 누가 봐도 훤칠하고 멋있는 히로키에게 마에다는 ‘멋있다~’라고 말하고, 그 말을 듣자 히로키는 울음을 터뜨린다.
히로키의 눈물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는 아무것에도 크게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꿈도 없다. 오직 현실적인 앞날만 생각해서, 재능 있다는 소리를 듣지만 입시를 위해 야구부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비록 그 꿈이 이루어질 확률은 희박하지만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인가와의 연결을 느끼며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마에다를 보며, 그 순수한 얼굴을 동경함과 동시에, 그 반짝임이 없는 자신을 보고 ‘멋있다’라는 말을 듣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소용에 닿지 않더라도,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영화감독이 될 일은 없을지라도, 재밌으니까. 즐거우니까. 그 순간만큼은 나보다 더 큰 어떤 세계와 잠시나마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니까. 그들은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히로키가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는 그 표정을 너무 잘 이해했다.
속으로 히로키와 같이 울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 나의 시간과 열정에 아무런 보상이 없을 것 같고 미래는 불확실할 때, 안전한 길을 택한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길을 택한 친구들에게서 왜 묘하게 그들이 부러웠던 것이었는지. 허무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떠안고 창조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시대의 승리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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