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네 카페에서 친구를 만났다. 나에 대한 정보의 업데이트가 없으므로 나의 근황 얘기를 별로 할 마음이 없어서 친구와 서로 최근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일본 문화에 대한 이어령 작가의 분석글 <축소지향의 일본인> 그리고 독서 모임을 위해 열심히 읽고 있는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읽고 있다고 했다. (두 권 다 추천한다)
친구는 가방에서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꺼냈다. 더 케어 컬렉티브 (The Care Collective)-돌봄 문제를 연구하는 각기 다른 분야의 학자 다섯 명이 만든 그룹-의 <돌봄 선언>이라는 책이었다. 친구는 sns에서 어떤 사람이 찍어서 올린 사진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해서 찾아보았다 했다.
확실히 표지에 크게 쓰여있는 ‘돌봄 선언’이라는 문구는 그 책을 들고 있는 인물에 관해 인류애가 있으며 사회의 부도덕함에 맞서는 사회참여적 사람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친구는 그 커다란 문구 때문에 지하철에서 이 책을 들고 있는 자신이 무슨 광신도처럼 보이면 어떡하냐고 물었다). 책을 읽는 친구가 약간은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특정 신념을 주창하는 류의 글은 직접 구입해 본 적이 없고, 친구와 사회적 문제에 관해 깊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대화 주제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스템적의 취약성과 그 현실이 드러나는 뉴스들을 접하면서 이것은 어떤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그리고 계속 공부해나가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출판저널 523호> 좌담에서 심성보 교수의 마을의 생태화에 대한 글을 읽으며 돌봄과 공동체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돌봄 공백’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이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노인, 장애인, 아이들에 관한 것들. 엄마가 없는 집에서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화재가 발생해 동생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나, 미혼모 가정에서 아이의 방치, 빈곤 계층의 결식 등. 사회의 제도적 문제점의 결함 등이 여실히 드러나는 사고들이다.
“돌봄의 부재, 즉 무관심이 지배하는 곳”이 됐다. 신자유주의는 수익창출과 경제성장이 국민의 안녕을 보장하는 것보다 중요시되는 체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구조적으로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 안성희, <돌봄을 중심에 놓아야한다.>, 한겨레
돌봄 선언의 저자는 신자유주의 단점을 문제 삼으며, 가족, 마을, 국가 더 나아가 지구적으로 ‘돌봄’을 중심에 둬야 한다고 말한다.
<돌봄 선언>에서 돌보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핵심특성 중 하나로 저자가 언급한 ‘공공공간’에 주목했다. 빠른 도시화와 인구수의 증가로 서울은 고도로 문명화되어 가지만, 그에 비해 자연환경에 대한 유지, 관리는 잘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이런 점을 많이 느꼈는데, 큰 도시에서 센트럴 파크 같은 도시공원이 잘 조성돼 있는 해외의 사례들과 다르게 서울은 길에서 잠시 앉아서 쉴 벤치조차 찾기 힘들다. 골목마다 빼곡히 들어선 카페 지옥 속에서 잠시 쉬기 위해선 돈을 지불해야만 한다. 이러한 무료 공공공간의 결여로, 사람들은 휴식마저도 빈부 차이에 따라서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실질적 공원 수를 따진다면 그 수가 적다고 보긴 힘드나 그 접근성이 힘들다)
그에 따라서 계층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같이 모여 앉아서 소통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지고 소통 장소의 부족은 소통의 단절로 이어진다. 여유공간의 부족은 마음속의 여유도 앗아가 버린다. 계층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공공장소가 많아질수록, 그에 따른 사회적 움직임에 대한 논의, 모임이 자연스레 생겨날 것이고 봉사활동도 자연스레 생겨날 것이다. 제대로 된 공원 하나가 교류의 장을 만들고 생태주의적 마을을 지향하게 한다.
유현준 건축가는 도시를 뇌의 시냅스에 비유하며 도시 안의 연결관계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도시의 쉼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건축 공간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사회에서 관계를 컨트롤할 수 있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좌담에서 심 교수가 언급한 ‘생태적 마을’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바이러스와 공생하는 마을, 생태적 마을을 만들기 위한 걸음 중 하나가 공공공간이라 생각한다.
인터넷상에서의 소통의장을 중요시하는 것과 함께 도심 속 공공공간의 개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최근 비건 지향을 하는 사람이 한 말을 자주 생각한다. “소수의 ‘완벽한 비건’보다는 ‘비건을 지향하는’ 다수의 사람이 비건 친화적으로 만드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정확한 워딩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맥락은 이러했다)
이것은 비단 채식주의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비거니즘과 인권, 지구환경을 위한 운동은 결코 무관하지 않으므로)우리는 어떤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조금은 완벽주의적 입장을 버릴 필요가 있다. 호기심, 관심에 대한 불씨를 끄게 만드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어차피 확실하게 해결될 것이 아니면 무슨 소용인가?’라는 회의적인 생각말이다. 세계와 타인들에 대한 염려와 생각, 그리고 공동체 의식, 공동책임 의식이 개인주의적 세상에서 돌봄 연대를 만들어갈 단초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돌봄을 필요로 한다.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인간은 지구 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특히 인간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짐승과 다르게 태어나서 꽤 오랫동안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최소 18살은 되어서야 독립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 돌봄을 주고 늙어서 다시 돌봄을 받는 위치에 처해지게 된다.
이런 생애주기를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돌봄 문제를 사회적으로 중심에 놓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은 이상하기도 하다.
보편적 돌봄은 직접적인 돌봄 노동뿐 아니라 타인들과 지구의 번영에 대해 관여하고 염려하며 공동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형식을 되찾는 것과 자본주의 시장의 대안을 수용하고 돌봄 인프라의 시장화를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의 복지국가를 중앙정부와 지역 차원 모두에서 회복하고 근본적으로 심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국가적 차원에서 그린 뉴딜을 창조하는 것, 돌보는 국제기관들과 좀 더 느슨한 국경, 일상적 세계시민주의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돌봄선언> -6장 | 세상에 대한 돌봄, P.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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