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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마 Mar 31. 2021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기 [드라마]

서로 서툰 우리가 살아가는 법


관계의 벽



일본 만화의 붐을 일으킨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에는 지구를 습격하는 사도들이 있다. 이들은 ‘AT필드(Absolute Terror Field)’라는 일종의 방어막을 가지고 있다. AT필드는 매우 강력한 그들의 방패로 원자 폭탄을 포함한 통상의 병기들은 가볍게 막아낸다. AT필드를 무력화시켜야 사도를 제압할 수 있기에, 이를 공략하는 것은 사도와의 전쟁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반게리온 세계관에서는 인간에게도 사도와 같은 마음의 AT필드가 있다고 한다.  



AT 필드의 정체는 마음의 벽. '나'를 '나'로서 있게 해 주는 힘이자 타인에 대한 공포, 인간의 독립된 자아 그 자체를 상징한다. (…) 불완전한 존재들인 릴림들은 AT 필드가 미약했기 때문에 '하나가 되려는 욕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끊임없이 외로움을 느끼고 서로에게 다가가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완전 생명체인 사도와는 달리 비정상적인 방법[7]으로 태어나 군체의 형태를 하고 있는 인간은 영영 완전한 단일체가 될 수 없어, 서로를 배척하고 밀어내면서도 또다시 다가가며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었고, 이런 불완전성에서 나오는 고통 때문에 모든 분쟁과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AT필드, 나무위키, 2021-03-22  



즉 인간들은 부자연스러운 탄생의 과정으로 인해 선천적인 육체의 유약함을 갖고 있다. 이로 인해 타인과 하나가 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자연적으로는 완전한 단일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실존적 불완전함에서 나오는 외로움으로 인해 서로 의지하고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는 불완전함의 기반에 있는 것이다.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가까워질수록 상대와의 경계를 명확하게 느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에반게리온 세계관에서 인간은(에반게리온 세계관에서 ‘릴림들’) 태초에 행성에 잘못 불시착되어 외삽된 존재들이다. 즉 지구의 적법 거주민은 인간이 아니라 사도이다. 안노의 sf적인 상상력에서 기인한 세계관은 매우 암울하고 염세주의적인 세계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그린다. 


아마도 안노 히데아키(신세기 에반게리온 원작자)라는 염세주의자가 당시 세상을 살면서 인간관계에서 느낀 회의감을 에반게리온에 투영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는 우울증을 앓았다.) 


안노가 현실에서 섬세하게 포착한 타인과의 소통의 한계는 에반게리온의 인물 들 간의 관계로 잘 그려져 있다. ‘신지’는 독단적인 자신의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해 감정의 골이 깊어져 가고, ‘아스카’ 또한 ‘신지’를 향한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적절한 소통의 부재는 종국으로 갈수록 파국에 치닫게 되는 결말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소통불능으로 은유되는 AT필드와 여러 겹의 허식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야 할까.   



달라서 고통스럽고 즐거운 것 






[플리즈 라이크 미 please like me]는 호주 일상 드라마다. 호주 드라마는 처음이었는데 결론은 여러 가지 면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시즌1을 견디면 시즌2부터는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과 특유의 사랑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더욱 몰입해서 볼 수 있다. [플리즈 라이크 미]에서 나오는 인물은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 다들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고 결함이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인물들이 자신의 결함을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솔직하고 개방적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한국에서 사는 나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솔직하다. 호주 사람들 일반이, 아니면 그들의 문화가 원래 그런 것 인지도 모르겠다. 종종 상대방은 배려하지 않고 말을 내뱉는 것 같지만 악의적이지는 않다. 


인물들은 자신이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에, 무슨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뚜렷한 서사중심이 아닌 쉴 새 없는 ‘대사’들의 향연이 이 드라마의 특징이다. 


주인공인 조쉬는 스무 살에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여자 친구에게 차이면서 듣게 된다. 그는 매우 말이 많은 tmi형 인간이다. 거의 생각나는 대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조쉬는 시즌 초반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며 첫 남자 친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시즌이 지날수록 조쉬는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취향, 성적 정체성과 함께 주변 인물들을 더 이해하게 된다.  





이들은 관계의 고수들이다. 자신만의 강단이 있고 개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를 지나치게 경계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배려하지 않는다. 감정에 솔직하지만 매몰되지는 않는다. 도처에 깔린 슬픔 곁에서 밥을 먹고 장난을 치고 웃는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그들도 능숙하진 않다. 


조쉬는 갓 태어난 자신의 이복 여동생의 기저귀를 벗겨주면서 말한다.  


“자, 이렇게 하자. 너 기저귀 벗기는 동안 역겨운 표정 안 지을게. 네가 몸매에 콤플렉스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사람들이 네 기저귀를 벗길 때마다 역겨운 표정을 지으면 얼마나 싫겠니? 좋아... 아이고! 너무 역겹구나 정말 더러워! 그래도 괜찮아 나도 역겨운 사람이거든 우린 다 역겨워. 다들 응가를 한단다 정말 착하구나. 오늘 좋은 거 배웠지? 사람들은 다 역겨워.”  


위 대사가 세상을 바라보는 이 드라마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도 엉망이고 너도 엉망이지만 세상도 엉망이야 그러니까 괜찮아!' 


드라마는 분위기가 사랑스러울 뿐이지 다소 무거운 소재들이 나온다. 우울증, 자살, 정신병… 하지만 ‘무거운 주제를 꼭 무겁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나?’라고 하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필연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며, 어쨌든 우리는 그것들과 계속 살아가고 있다. 자기 연민만 하기엔 삶에 즐거운 것들이 너무 많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 



온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온전히 사랑할 순 있다.


그렇다면 타인과 소통을 하기 전에 받아들여야 할 것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말은 쉽다. 현실에서 실행하기가 어렵지. 


관계의 갈등에서 나오는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가 있다. 어쩌면 이해하는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완벽히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불가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것인지 묻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상대가 백 프로에 가깝게 불가해한 존재라면 애초에 관계의 시작이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상대의 복잡성을 포함해서 상대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닌가. 캐릭터가 판에 박힌 듯 예상되는 말과 행동만 하면 매력이 없다. 주인공이 히어로가 할 만한 짓만 하면 재미가 없다. 그 안에 악도 있고 고통이 있어야 매력이 생긴다. 


서로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는 것, 최대한 솔직해지는 것. 이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세계의 시작일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오해한 상대의 모습에 사랑에 빠지곤 한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 사랑의 다양한 모양 중 하나이다. 애초에 모든 관계가 AT필드(방어막)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시작되는 게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상대를 둘려 싼 막(막을 포함한 상대)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관계를 맺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죽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 

『미국의 목가』 1권 62쪽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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