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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마 Apr 20. 2021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영화]

청춘의 밤은 아주 길고도 찰나 같은 것


청춘의 밤은 아주 길고도 찰나 같은 것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유아사 마사아키 (2017)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나이 때에 따른 시간 체감을 노인의 시계 초침과 여대생의 시계 초침으로 보여준다. 노인의 시계 초침이 질주하듯 빠르게 가는 것과 달리 아가씨의 손목시계는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심리적인 시간 체감을 시계 초침이라는 현실의 사물로 표현을 한 것이다. 때문에 단 하룻밤의 꿈같던 시간을 이백 노인은 수년 전의 사건으로 기억한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닌, 심리적인 시간(mind time)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시간과 노인의 시간은 정말 다르게 흐르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아이 시절의 하루는 정말 길게 느껴졌다. 낮잠을 자도, 학교를 다녀와도 친구들과 밖에서 놀아도 하루는 끝나지가 않는다. 하지만 노인의 시간은 밥을 먹고 낮잠을 자면 반나절이 지나 있다.


이에 관해 현대에는 여러 가지 과학적 분석이 있다. 하나는 도파민의 분비(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에 따른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노화함에 따라 도파민을 덜 분비하고, 이것은 생체시계에 영향을 미치는데, 생체 시간이 젊은 시절과 달리 느려지면서 상대적으로 외부세계의 시간 속도가 빠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의 차이가 있다.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처음 가는 장소로 갈 때는 약속시간이 너무나 급박하게 느껴지지만, 두세 번째에 그 길을 가면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시간이 여유롭게 느껴지는 경험 말이다. 초행길은 상대적으로 익숙한 길에 비해 밀도가 높게 기억이 되고, 기억된 정보량이 많으면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익숙한 것들은 기억에서 배제하기 때문에 어제가 그제와 비슷하다면 기억량이 적기에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해 첫인상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히는 ‘초두효과’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분석은, 시각정보(mental image)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신경망이 아주 복잡 해지는데, 이 때문에 신호를 전달하는 경로가 더 길어지게 된다. 즉, 젊은 시절 모든 경험이 아주 의미 있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사건들이 더 특별했던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시각적 경험들이 빠른 속도로 처리되어서 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은 것에 감탄한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더 깊거나 더 의미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빠른 속도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미 듀크대 기계공학 교수 애드리안 베얀(Adrian Bejan)이 3월 18일 저널 <유러피안 리뷰>(European Review)에 게재한 소논문


어찌할 줄 모르는 그 시절의 세계와 과잉된 자아의 충돌, 엄청난 정보량과 그 정보량을 받아들이는 신경전달의 처리 속도. 우리가 젊은 시절의 축제 같던 하룻밤을 잊을 수 없는 것도, 첫사랑이 잊혀지지 않은 것도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젊음의 한 특성인 것이다. 이런 젊음의 특성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젊음은 미숙하기에 그 시간의 중요성을 모르고, 이미 깨달았을 때 우리의 시간을 짧아져 있다.



집단적 환상성, 일본이 잃어버린 젊음.





어린이는 현실과 환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반쯤은 환상세계에, 반쯤은 현실세계에 발을 담그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쉽게 신비를 믿고 경험한다. 상상적인 이야기를 가미한 놀이는 논리적이기보단, 비약적이고 중구난방이다. 이런 판타지적인 경험을 영화는 컬러풀한 작화로 흥미롭게 구현한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대학교를 배경으로 술자리, 축제, 시장, 연극이 벌어지는 아주 긴 하룻밤을 주인공 검은 머리 아가씨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선배, 여러 가지 관계로 얽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경험한다. 의식의 흐름처럼 그들은 밤거리를 유영하고, 인연은 또 다른 인연과 이어진다.


술에 취한 그들의 정신이 불러낸 착란인지 그들과 함께 취해버린 이 세상의 농간인지 사물들은 괴상하게 움직이고, 인물들의 내면은 마법적으로 시각화되고, 아무리 부어라 마셔도 체력은 팔팔하다. 아이의 환상세계가 자연의 선물이라면, 어른의 환상세계는 혈중 알코올에 의한 혹은 궤변에 의해 만들어낸 환상이다.



검은 머리 아가씨는 구세대로 대표되는 이백과 술 대결을 한다. 그들은 전설적인 ‘모조 전기 브랜디’라는 술을 마신다. 술잔을 번갈아 기울이며, 이백은 ‘삶은 덧없고 허무한 것.’이라 말한다. 검은 머리 아가씨가 말하는 세상은 ‘풍윤하고 따뜻한 것,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리고 검은 머리 소녀는 이백을 이긴다. 장광설과 궤변을 늘어뜨리기나 하는 무기력한 대학생들 사이에서, 즉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현세대에게, 화창한 미래를 꿈꾸는 검은 머리 소녀는 젊음은 응당 이래야만 한다는 작가의 마음이 아닐까.


버블경제 시대, 그 이전은 시스템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뭔가를 시작하는 것은 쉬웠고(결과가 어떻든) 그렇기에 폐허 위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있지 않은 현실에도 절망하기보다는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실제적 현실은 어떻든 사회적 분위기는 그야말로 젊음의 패기, 무한 긍정으로 넘쳐 났던 시기였다.


하지만, 최초로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할 것으로 예상되는 현세대는, 비집고 들어가 내 자리마저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한 견고한 시스템, 불합리한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한다. 고학력에, 교육받은 MZ의 인생의 경로는 부모, 선생이 설계를 해준다. 청년취업은 난항이고 반복된 좌절은 무기력함으로 바뀌어 있다.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안전 지향적이며 개인주의가 심하다. 현 일본의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어른의 세계를 거침없이 탐험해 나가는 검은 머리 소녀는 다소 이상적인 모습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대’로 남아버린 버블경제 시대를 지금의 대중문화 소비층처럼, 작가는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 까. 일본의 ‘시티 팝’이 유행하는 것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그 시대에 현세대가 향수를 느끼는 것도 지금은 느낄 수 없는 경제적 윤택함과 폭발적인 대중문화의 발달,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현재의 행복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즉 검은 머리 소녀와 그녀의 환상적인 밤은 그 시절의 젊은 일본인 것이다.



일단 걷자, 세상은 다 이어져 있다.



이백은 검은 머리 소녀에게 말한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계속해서 걷는다면 우리가 당도하게 되는 건 무엇일까. 지구는 둥그니까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날 것이다? 이 영화는 ‘인연’ ‘이어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자 주인공은 검은 머리 소녀 앞에서 우연을 가장해서 자꾸자꾸 그녀의 눈에 띄기 위해 노력한다. 일명 ‘최. 눈. 알’ 작전; 최대한 그녀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기.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계속되면 운명으로 바뀔 거란다.


또 다른 사건은 헌책 시장에서의 장면이다. 헌책 시장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책의 신’이 나타난다. 책의 신은 모든 책은 연결이 되어있다고 하며. 여러 사연들이 얽히며,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연결되어 있는 수십 개의 책의 연결성을 들려준다. 그리고, 수집가 의해 독점이 되고 거래되는 희귀 책들이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마법을 부린다. 우리는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고, 그 인연의 끈으로 인해, 그리고 신의 도움에 의해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의 인연은 이성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에 의해 정해진 ‘운명’이라기보다, ‘바라는 마음’에 의한 것이다. 뭔가를 강하게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을 한다면, 그 ‘마음’이 곧 ‘인연’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즉 정해진 운명보다 앞선 마음속의 바람이 인연을 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젊음은 그 자체로 통통 튀는 생명력과 변덕스러움을 갖고 있어서 이 인연이 있다면 또 다른 인연이 나타나고 생각 지던 못했던 우연에 또 다른 인연에 끌릴 수도 있다. ‘팬티 총대장’이 그토록 찾던 운명의 상대인 사과 여자를 앞에 두고도 갑자기 떨어진 잉어에 머리에 맞고 급 다른 후배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그래서 젊음은 어디로든 계속해서 걸어야 한다.


오랫동안 찾던 책과 마주치거나, 방금 걸으며 생각했던 책이 불쑥 눈앞에 나타나면 전 운명 같은 것을 느낍니다. 헌책 시장의 신이 있어서 마음속에 있던 책과의 행복한 만남을 돕고 헤어졌던 책과는 재회하게 해 줄 것 같은 그런 예감까지 들죠.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신비했던 한밤의 축제가 끝나고 이성이 세상을 채운 낮에, 짝사랑 선배와 여자 주인공의 풋풋한 로맨스로 귀결된다. 어쨌든 이영화는 술을 마신 듯 이야기가 이리저리 튀고 기호들이 쏟아지며 어떤 명징한 것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나에게 다가온 장면들에 한해서 해석을 했다. 여러 가지 분석 또한 가능할 것이다.


젊은 날의 미숙함, 찌질함도, 이상했던 밤들도 나중에 생각해보면 다 인연을 위한 우리들의 몸짓이었던 것이라고. 이런 결론이 편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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