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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진 May 25. 2020

한글날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아나운서 부부의 운명

죽다 살아났던 운명의 추첨

우리는 일찌감치 결혼식 장소를 명동성당으로 정했다. 양가 부모님께 한 푼도 손을 벌리지 않고 온전히 우리 둘이 모은 돈으로 식도 올리고 집도 구하고 신혼살림도 꾸려야 했기에, 호텔 결혼식이나 고급 웨딩홀에서의 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았지만 사실 우리 둘 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기운이 빠지는 성격이라 시끌벅적한 결혼식을 원치 않기도 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경건함과 엄숙함을 최우선 순위로 꼽았다. 또한 우리 가족은 어렸을 때부터 모두가 천주교 신자여서 명동성당만큼 최적의 장소는 없었다. 신자가 아닌 아내도 처음엔 조금 고민했지만 고맙게도 흔쾌히 받아들여주었다.

 다만, 명동성당은 아무나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 년에 두 번, 상반기와 하반기의 결혼식 날짜를 추첨으로 뽑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 졸이며 운명의 추첨 날을 기다렸다.


 우리는 같은 아나운서 일을 하고 있기에 서로에게 가장 의미 있는 날인 한글날을 목표로 했다. 또한 당시 한글날은 목요일이었다. 주말에 결혼하면 딱 일주일밖에 갈 수 없는 신혼여행을 목요일부터 시작해 그 다음 일요일까지 11일 동안 갈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이유가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대안은 없었다. 우리가 점찍어 둔 그날이 아니면 그냥 돌아 오자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께도 식 날짜 추첨을 다녀올 건데, 우리는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을 뽑고 올 거라는 언질만 드렸다.


 2014년 하반기 혼인성사 추첨이 있던 날, 4월의 따스한 봄날에 우리는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수많은 커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결혼을 앞둔 커플들만 모여 있으니 이리 봐도 애정행각, 저리 봐도 애정행각이 끊이지 않았다. 명동성당의 경건한 분위기와 대조되는 풍경이랄까. 뭐 우리도 그랬지만 아무튼 그랬다.

 성당 관계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모인 커플은 대략 이백 커플이 조금 넘는다 했다. 경쟁자가 이백 커플이나 된다는 이야길 듣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수치로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자, 빈틈없이 착 달라붙어 설명을 듣던 수많은 커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추첨방식은 간단했다. 커플 대표 1인이 1번부터 300번까지의 번호가 적힌 구슬 중 하나를 뽑는다. 모든 커플이 번호를 다 뽑은 후엔 1번부터 차례대로 나와서 혼인성사 가능 날짜가 적혀있는 달력에 원하는 날짜를 체크하면 되는 것이었다. 1번 구슬을 뽑는 행운의 주인공은 가장 먼저 날짜를 정할 수 있고, 2번은 1번이 고른 날짜를 제외하고, 3번은 1,2번이 고른 날짜를 제외하고, 이런 식으로 추첨이 이루어졌다.


 흔히 말하는 ‘똥 손’으로 유명한 나인데 아내, 당시 여자 친구는 나에게 추첨의 중책을 맡겼다. 그 흔한 경품행사에서 단 한 번도 당첨돼본 적이 없는 나인데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씩씩하게 나가서 자신 있게 구슬을 뽑았다.     

 

 추첨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아무리 보아도 그 번호가 맞았다.

‘155’


운명의 번호 155번


‘이백 커플 중에 155번이라니.......’

절망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성당 관계자께서 신자임을 증명하는 증명서 위에 빨간색 펜으로 슥슥 내 번호를 다시 적어주었다. 되새김질까지 당하니 이제 그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앉아있는 여자 친구를 나라 잃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표정 하나로 여자 친구는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리에 돌아가 앉으니 왜 그러냐고, 몇 번을 뽑았기에 그러냐는 여자 친구에게 대답 대신 번호가 적힌 서류를 보여주며 고개를 숙였다.


 추첨이 끝나자 성당의 강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많은 커플들의 희비가 교차했다. 좋은 번호를 뽑아온 여친, 남친을 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하며 사랑이 더더욱 몽글몽글 피어나는 커플이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뒷 번호를 받은 커플들은 죽상을 하고 앉아 서로를 다독거리고 있었다. 각자의 부모님께 전화해 1순위, 2순위 날짜를 받다 의견이 맞지 않아 싸움으로 번지는 커플도 있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짐을 챙겨 떠나는 커플도 눈에 들어왔다. 나도 고민하다 여자 친구에게 말했다.

“자기야, 우리도 그냥 나갈까? 한글날은 10월이니 당연히 인기가 많을 거고, 155번은 거의 가능성이 없을 거 같아."

그러자 조금 생각하던 여자 친구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한번 기다려보자. 그날이 운명이면 우리에게 찾아오겠지. 그냥 이것도 즐기면서 기다려보자.”




 “추첨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혼인성사 날짜를 정하도록 하지요. 1번부터 앞으로 나오세요.”

성당 관계자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탄식과 부러움이 섞인 감탄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우와아아아아.......”

 영광의 주인공이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아직 그 누구도 밟지 못한 전인미답의 장소로 향했다. 1번을 뽑은 커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들이 1순위로 원했던 그 날짜에 표기를 하고는 확인 증서를 받고, 의기양양하게 강당을 빠져나갔다. 마치 벌써부터 결혼식 마지막 순서인 ‘신랑 신부 행진’을 하는 듯했다.


 하나둘씩 앞 번호의 커플들이 날짜를 받고 사라졌다. 동시에 원하는 날짜를 앞에서 모두 빼앗긴 커플들도 사라졌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니 어느덧 강당에는 우리를 포함해 스무 커플 정도만이 남아있는 듯했다. 모두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커플들이었다. 모두가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정말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의 11시 혼인성사만큼은 아직도 생존해있었다. 이른 시간 예식의 부담감이 있었던 것인지 130번이 지나도록 그 누구도 선택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순번이 하나하나 지나갈수록 초조함은 극에 달했고 떨림과 긴장이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우리는 손을 꼭 붙잡고 “제발” “제발”을 연거푸 외쳤다. 한글날 남아있는 그 딱 한 시간만큼은 제발 고르지 말아 달라고 앞 번호 사람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150번이 넘어도 그 날짜는 살아있었다. 151번, 152번, 153번....... 갈수록 두근거리는 마음이 커졌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154번이 날짜를 고를 때는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 스페인 전에서 홍명보 선수가 승리를 확정 짓는 승부차기를 하기 직전보다 더 극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차마 쳐다보기도 힘들던 그 순간, 154번 커플은 다른 날짜를 선택해주고는 유유히 강당을 빠져나갔다. 우리에게 크나큰 결혼 선물을 준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끝까지 남아있던 우리의 희망


 2014년 10월 9일 한글날, 12시부터 4시까지의 모든 혼인성사는 간택을 받았다. 154번의 선택 뒤에도 남아있던 그날의 11시 예식, 결국 우리는 그토록 원했던 그날의 결혼식을 고를 수 있었다. 우리 역시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으며 다행스러움과 만족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유유히 강당을 빠져나왔다.




 우리 부부는 각 자의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서 방송을 하다 만나게 됐다. 연애시절 아내와 처음 함께 공동 MC를 본 행사는 ‘세종대왕 탄신일 경축행사’였다. 155번을 뽑고도 가장 인기 있는 10월, 그중에서도 원했던 한글날에 식을 올릴 수 있었던 그 날 운명의 추첨도 있었다.


 직업은 물론 처음 함께한 행사와 운명의 추첨까지.......

이래저래 우리 부부는 한글날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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