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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진 Apr 29. 2020

내가 내일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1박 2일 혈투 끝에야 찾아온 부부로서의 첫걸음


결혼식 D-20시간

결혼식 전날 오후, 고해성사를 위해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내일이다.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룬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벅차고 감격스러웠다. 고해성사를 기다리며 명동성당 앞 벤치에 앉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결혼식 식사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명동성당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신랑이나 신부의 가족 중 한 가족은 결혼식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식사를 해야 했는데, 결혼식 전날까지도 어느 가족이 걸어서 이동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 준비하는 동안 모든 걸 서로 배려하던 모습과는 달리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서로 “니가 가라. 하와이.”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던 우리는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2년 동안의 연애, 그중 첫 싸움이 결혼식을 불과 스무 시간 앞두고 시작되었다.

     

결혼식 D-19시간

휴대전화 이어폰을 타고 흥분한 여자 친구의 목소리가 하나하나 꽂히기 시작했다. 수화기가 아니라 양쪽 귀에 단단히 고정돼있는 이어폰을 통해 화난 목소리를 들으니 분노가 생생하게 전달됐다. 이 사람이 내가 2년 동안 만나온, 내일 결혼하기로 한 그 상냥하던 사람이 맞나 싶어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 역시 지지 않고 마구마구 받아쳤다. 있는 말 없는 말 만들어내며 아무 말 대잔치, 개싸움이 되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서로의 심장에 꽂히기 시작했다. 있는 대로 막말이 오가다 전화가 끊기니 마음속에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분노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결혼식 D-16시간

고해성사를 해도 마음이 비워질 리 없었다. 집에 와서도 온통 미워하는 마음뿐이었다. 너무 열 받아 그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제 형이 독립을 하게 됐으니 마지막으로 한잔하자고 남동생을 꼬셔 집 앞의 호프집으로 향했다. 결혼식 전날이지만 술은 잘만 쭉쭉 들어갔다. 곧 거나하게 술에 취하니 별의별 상상을 하게 됐다. ‘만약, 내일 결혼식장에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알코올이 조금 더 들어가니 용기도 생겼다. ‘그래. 안 가면 되지 뭐. 안가!’ 동생과 한껏 취해서 집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저녁 10시, 혹시나 하며 카톡을 열어봤다. 결혼식 전날의 우리는 7시간 넘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대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결혼식 D-7시간

새벽 4시. 알람을 안 맞추고 잔 거 같은데 알람이 울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제 아침 일찌감치 알람 설정을 해둔 것이 기억났다. 카톡을 확인해보니 역시나 여자 친구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결혼식 전날 오후부터 13시간 넘게 결혼 당사자들이 아무 연락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아주 빠르게 어제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명동성당 앞에서 전화로 대판 싸우고, 온갖 상상을 하고, 술 먹고 결혼식 안 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잠들었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덧 나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가보자. 일단 가서 이야기를 해보자.’


결혼식 D-5시간

미용실에 들어서자 장모님과 여자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아직 앙금이 풀리지 않았다. 여자 친구와는 그냥 눈인사만 주고받고 장모님 앞으로 직행해서 인사하고 안부를 여쭈었다. 그리고 휭~ 내 자리로 가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았다.


결혼식 D-1시간

식장에 들어가기 전 웨딩 스냅사진과 동영상 촬영이 이어졌다. 사진작가가 우리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뺨에 뽀뽀해라, 진하게 키스해라 등의 주문을 계속 이어갔다. 시키는 일을 그냥 기계적으로 영혼 없이 이어가고 있는데, 정점의 순간이 찾아왔다. “자~ 신랑은 신부에게 사랑한다고 3번 말하세요.” 나는 무뚝뚝하게,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 마지못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3번 외쳤다. 그만 좀 말했으면 좋겠는데 이 놈의 사진작가가 또 입을 뗐다. “신부님도 답해 줘야지요?” 여친의 뒤끝은 강렬했다. 차마 사랑한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나 보다. “나도. 나도. 나도.”


결혼식 D+20분

신부님께서 성혼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제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연애는 끝나고 결혼 생활이 막 시작됐음을 알리던 그 순간, 고맙게도 아내가 먼저 귓속말로 이야기해줬다. “오빠, 미안해.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지? 우리 화해하자. 헤헤” 이 말 한마디에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내가 먼저 말해주지 못해 너무나도 미안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우리 잘 살자. 사랑해. 고마워.” 이번엔 영혼 없는 무조건 반사가 아니었다. 사랑이 듬뿍 담겨있었다. 내내 신경전을 이어가던 우리는 이렇게 결혼식 중간에, 부부가 되었노라 선언되자마자, 결혼이 시작되자마자 극적인 화해를 했다. 응어리가 사라지니 그때부터는 온전히 결혼식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 단 한번, 나와 여자 친구, 아니다, 나와 아내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 롤러코스터를 타던 기분이 최고조로 치솟고 있었다.

     

결혼식 D+30분

초등학교 시절 자주 들었던 풍금 멜로디 속 그 결혼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손을 꼭 붙잡고 행진을 시작했다. 이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듯 인생 최고의 표정을 지으며 하객들께 답례를 했다. 지옥에서 탈출한 기분이었다. 잡고 있던 손을 더욱더 세게 잡았다. 이제 내 손을 잡고 있는 이 사람과 행복할 일만 남았다. 불과 두세 시간 전까지만 해도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던 생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냥 행복한 부부로서의 시작이었다.


결혼식 D+6년

우리는 다행히도 잘 살고 있다.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종종 미워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이제는 여유롭게 웃으며 그날을 떠올린다. 이런 아찔한 상상과 함께.


“여보, 만약에 우리가 그날 안 나타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내에게 들은 여자친구의 결혼식 D-16시간

결혼식이 내일인데 남자 친구와 대판 싸웠다. 이렇게 크게 싸운 건 처음이다. 싸워봐야 진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더니, 이 사람이 이렇게 배려심 없는 사람이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내가 내일 결혼하기로 한 이 사람,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믿을 수 있을까. 이런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당장 내일이 결혼식인데 어찌해야 할까.


‘내가 내일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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