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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단테 Jun 15. 2023

오랜만에 AA

알코올 중독자의 열한 번째 만남




많이 아팠다. 너무 오랜만에 아팠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A형 독감. 한 10년 만에 찾아온 이 아픔은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많은 것들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독감이 거의 지나갈 무렵 상담사님께서 이번주 AA자조모임(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의 자조모임)에 올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셨다.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몸이 아파서, 게을러져서, 나에게 더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들이 발을 묶었다. AA가 도대체 나에게 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귀찮음을 이겨내고 모임장소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몸이 좋지 않았고 식은땀이 났지만 차를 타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기존보다 집에서 조금은 멀어진 모임장소가 오늘따라 너무 짜증 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지각을 했다. 15분 정도 늦었고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에 계셨다. 모임 인원은 10명 정도. 처음 뵙는 분도 있었고 나처럼 오랜만에 나온 분도 계셨다.

 

내가 다니는 AA 자조모임에는 모임을 이끄는 리더는 없다. 다만 모임이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진행자가 존재한다. 진행자의 진행에 따라 모임의 철학과 참여 가이드라인을 낭독하며 모임을 시작한다. 나 자신의 솔직한 고백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고백의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갈 수 있도록. 낭독이 끝나면 약 5초 정도의 누가 먼저 주간에 있었던 일을 고백할지 눈치 보는 시간이 생긴다.- 서로 웃으며 쳐다보는 이 시간도 재미가 있다.- 그리고 한분이 고백을 시작하면 모임은  매끄럽고 빠르게 진행된다. 2시간이라는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게 느껴진다.


모임에 오시는 분들은 단순히 알코올 중독자들만 오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 중독 치료 병원에서 추천을 통해 오시는 분들, 나처럼 병원치료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이겨나가는 분들, 알코올 중독자를 옆에 둔 가족들, 심리 상담사들, 술을 끊을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들. 어떻게 찾아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나이대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다. -나는 남성분들만 오는 자조모음을 하고 있어서 내가 오는 모임에는 여성분들은 없다.-  


앞에서 모임을 얼마나 나오기 싫었는지 구시렁거렸지만 모임의 참석은 마치 운동과 비슷하다. 시작하기 전에는 너무 귀찮고 싫지만 끝나고 나면 너무나 뿌듯하고 기분 좋은. 그리고 모임을 단 하루 참석해서는 느낄 수 없는 공동체 의식과 깨달음들이 있는 점도.


"ㅇ"은 단주를 시작한 지 삼 개월, 모임에 나오기 시작한 지는 두 달 정도 된 분이다. 처음 모임에 나오셨을 때는 뒤늦게 단주를 시작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하는 마음을 이야기하셨고 한 달 정도 되었을 때는 단주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이번 모임에서는 그 자신감이 얼마나 자만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겸손을 이야기하셨다. 그 모임에 참석한 누구도 "ㅇ"이 말하는 자신감이 자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과정을 겪어본 사람들은 더더욱 그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모임에서 자신감에 차있을 때는 "너무 잘하고 있다. 자신감이 필요할 때다"라고 격려했고 겸손을 이야기하실 때는 "맞아요. 이 모든 과정을 길게 이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겸손일지도 모르겠어요."라고 응원했다. 이중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의 모습만으로 상대를 쉽게 판단하지 않고 서로가 단주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주 모임에서 나왔던 대화 중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은

과거,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려 했던 첫 번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고 지금까지 그것을 유지하는 이유와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잃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을 찾기 위해서 단주를 시작했지만 이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타인의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찾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이나마 더 나은 나를 찾아갔고 무너지고 없어지고 싶었던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나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고 조금이나마 한 발씩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지금 나에게 AA가 가져다준 선물 같은 것들이다. 오늘의 고통과 삶의 질문들은 앞으로 과거가 될 것이고 새로운 고통과 삶의 질문들이 찾아오겠지만 그 과정을 기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직접 부딪히게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도 많이 두렵고 걱정되고 도망가고 싶은 건 마찬가지겠지만 난 이겨내고 싶다. 어제의 방법이 오늘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


모임의 마지막은 언제나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를 읽는다. 머릿속에 외우고 있지만 기도를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AA모임을 끝내게 된다. 모임이 끝나면 많은 사람들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서 첫 숨을 내뱉었을 때부터 단 한 순간도 타인에게 삶을 빚지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최근들어 더욱 나를 지탱해주는 귀한 존재들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감사함을 느낀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역경보다 희망의 상실이라고들 한다. 내가 미약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때일수록 나를 지탱해주는 누군가의 존재가 희망의 이유가 되고 나아가서 살아갈 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도 살아 있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찌할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도 주소서














AA 자조모임에서 AA란  Alcoholics Anonymous를 줄인 말로 한국말로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를 뜻한다. 영화에서 여러 중독 현상을 겪는 사람들이 모여 자기 고백을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는데 AA는 그런 모임 중에 하나의 형태이다.

눈여겨보면 AA 자조모임이 있는 장소에는 AA라는 글씨가 건물에 작게 표시되어 있다. 전국에 크고 작은 모임들이 이뤄지고 있고 자조모임임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키고 누군가를 지켜주기 위해서 모임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A 모임은 전국에 위치해 있고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aakorea.org/index.html


자조모임이 어색하고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전국 각지의 중독관리센터를 이용해 보는 것도 좋다.


http://www.kaacc.co.kr/00_main/main.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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