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수노트 (대수롭지 않은 걸 적어 놓은 노트) *
끄적거리다 끼적거렸어
나는 알 수 없었어 내가 무얼 쓰는지
끄적거리는 나도 모르는데 누구도 모르겠지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책임감처럼 의무감처럼 아무렇지 않게 시간을 보내면 내 인생도 아무렇지 않게 될 것 같은 느낌.
그럴 때는 하얀 종이 위에 또박또박 글씨를 쓰기도 한다.
어떨 때는 이렇게 하얀 백지의 모니터 위에 자판을 두드리기도 하고.
펜으로 끄적거리고 있으면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 검은 선으로 흐르는 듯하고
자판을 토닥거리고 있으면 내 안의 어딘가에서 무언가 톡톡 튀어나오듯 하다.
무언가를 쓰지만 내가 도대체 무엇을 쓰는지 모를 때가 있다.
아니 모를 때가 거의 모두이다.
누군가 대화를 나누며 나는 그곳에 있지 않고 먼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흘러가는 시냇물의 방향이 정반대의 바다에 닿을지 모르는 것처럼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내 글이 어디로 흘러가서 어느 곳에 정착할지 알 수 없다.
내 글은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다.
나의 아들과 딸이 나로 인해 나오고 내가 키웠지만 내 것이 아니듯
내 글은 나에게서 나왔지만 내 것이 아니다.
길이란 내가 가기로 한 그곳에서 시작하듯
글이란 내가 쓰기고 한 그곳에서 시작한다.
아무렇지 않게 항상 생각해 왔듯이 대수롭지 않게 시작하지만
사실 그 시작은 너무나 힘들고 두렵고 난해하고 어렵다.
세상에 쉬운 시작이 있다면 다행한 일이고
이 다행함은 낙서와 닮았다.
툭 펜을 내려놓을 때 탕 그곳에서 시작한다.
번뜩하고 스치는 별똥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거의 하얀 백지이다.
그 놓여있는 백지를 놓여있는 하얀 백지로 두기 아까워서 채우려고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백지의 적막함에는 가득 채울 기대와 수고와 고단한 시간이 기다린다.
나는 낙서를 시작해, 어떻게 시작해, 그냥 낙서로 시작해
일단 쓰고 보는 게, 일단 시작하는 게, 어디로 흐를지 어디에 닿을지
알 수가 없는 게 나를 즐겁게, 아무거나 쓸게, 그러다가 쓸게
낙서를 낙서해, 쓰다 보면 쓰니까, 글씨가 모이면 그러다가 글이지
낙서가 위대한 건 아무렇지 않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이 반찬이고 시작이 반이니 일단 시작하면 반은 간 것이다.
하지만 모른다. 낙서가 어디까지 클지 어디까지 닿을지
내가 나를 지금의 상태로 대하면 지금의 상태로 남겠지만
내가 원하는 성장한 모습의 나로 대하면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듯
낙서를 낙서로 대한다면 그냥 낙서로 남겠지만
낙서 뒤의 위대한 무엇으로 낙서를 대한다면 낙서는 위대한 무엇으로 남을 것이다.
낙서는 무언가를 해야 할 때 그 무언가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낙서의 순수함임을 알아야 한다.
그 자유로운 시작과 자유로운 글걸음으로 여행하는 것이 낙서의 순수함이다.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다가 보면 100장의 사진에서 한 장의 사진을 건지듯
낙서는 무언가 나에게 하나를 건네줄지 모른다.
주지 않아도 좋아. 나도 준 것이 없어. 그냥 쓰다 보면은 그냥 즐거워
너도 그게 좋다면 나도 그것이 좋아. 우리 좋으면 그걸로 된 거지
무언가를 해야 하지만 그 무언가를 알 수 없을 때가 있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을 때 왜냐면 모르거든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모두 그렇잖아 나만 그렇지 않아
낙서는 헤매는 힘 헤매다 찾게 돼
헤매다 찾는 길처럼 헤매며 쓰면 돼
버릴 것을 잔뜩 써, 남길 것을 쓰지 마
버리다 보면은 남김없이 남으니
그걸 모아 담으면 무언가는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