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색채로 그리는 하루, 소리를 그리는 화가 홍세진.
인공와우(난청이나 청각장애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발된 청각 보조 장치)를 통해 세상을 듣는 한 미술작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홍세진, 2살 무렵 청력을 잃었다. 그는 매일같이 캔버스 앞에 앉아 조색의 어려움과 씨름하며 자신만의 색채를 찾아가는 여정을 이어간다. 단순히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작업은 ‘실제’와 ‘공간’ 사이의 틈을 가시화하는 데 있다. 소리와 침묵 사이의 경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와 감각의 층을 색으로 풀어낸다.
그는 동트기 전의 아침을 사랑한다. 고요 속에서 비로소 찾아오는 섬세한 순간들, 자신만의 세계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이 시간에는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멈춘다. 인공와우가 전해주는 미세한 진동조차 잠잠해지는 그 고요 속에서 그녀는 붓을 들고 색을 만들어낸다.
미술작가로서 매일 마주하는 조색의 어려움은 도전이자 축복이다. 그녀의 작업은 단순히 보이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와 공간 사이에 숨겨진 틈을 찾아낸다. 그 틈은 누구에게도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을 색으로 가시화한다.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끌어내는 것이 그녀의 일이자 언어다. 조색은 언제나 어렵다. 매번 새로운 색을 찾아내야 하는 그의 작업은 단순히 기술적인 일이 아니다. 조색은 마치 글을 쓰는 것 같다. 색을 섞어가는 과정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업이다. 어느 날은 강렬한 빨강으로 외치는 날도 있고, 어느 날은 은은한 회색으로 속삭이는 날도 있다. 붓질 하나하나에 느낌과 생각이 담긴다. 그녀는 색으로 하루를 기록하고, 하루는 그림이 된다. 그것은 그의 글, 그의 하루와도 맞닿아 있다. 그림은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 쓰는 나만의 글이다. 붓질 하나하나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색채를 통해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오늘도 그녀는 동트기 전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캔버스 앞에 선다. 어쩌면 그의 작업은 누군가에게 너무도 느리고 무의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믿는다. 이 고요 속에서 만들어지는 색채야말로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진솔한 방법이라는 것을. 그의 하루는 그림이고, 그림은 곧 하루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그녀만의 색채는 말한다. “이것은 나만의 하루, 나만의 그림입니다.”
인공와우가 전하는 작은 진동마저 사라지는 시간에 오늘을 그림으로 쓰고 있다.
세상의 무수한 틈새를, 고요와 소리 사이의 공간을 색채로 채워 나간다.
누군가는 무언가로 하루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