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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춘희 Mar 16. 2023

김 여사의 오만

 젊은 노인의 단상


김 여사에겐 지구촌에 딸 1, 2가 있다. 얼마 전 결혼에 골인한 딸 2가 뜬금없이 '엄마는 삶의 목표가 모여?' 톡이 왔다. '삶의 목표'? 생소하다. 목표 없이 살아도 되는 나이가 된 건가?  

   

'삶의 목표' 갑자기 거대 담론이 나올 거 같은 톡에 김 여사는 간단하게 '웰 다잉'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딸 2가 '미라클 모닝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삶의 목표를 정하라고 해서 궁금해서 물어봤어.' 했다. 딸 2가 책 읽을 때는 생각을 정리할 일이 생겼다는 신호이다.


딸 2는 해결할 문제가 생기면 동굴 속으로 숨는다. 수다스럽지 않게 혼자 생각하는 아이이다. 책에서 답을 찾고 의미를 찾는 신중한 딸이다.  

   

김 여사의 딸 2는 스물아홉에 출퇴근 거리를 핑계로 서울로 독립했다. 독립해 나간 오피스텔에 가방끈이 긴 가난한 청년을 끌어들여 동거를 시작했고 1년 후 결혼 했다.


한창 깨가 쏟아질 신혼에 삶의 목표를 정립할 건수가 생긴 건가? 동거 1년은 허당이었나? 김 여사 짐작에 둘은 치열하게 싸우는 중인 듯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는 데 1시간이나 걸리며 열열한 연애를 했던 김 여사 신혼도 삿대질하며 싸우긴 했다.


그때마다 김 여사의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는 처방은 식탁에 앉아 책을 펴는 일이었다. 처음 손에 잡혀서 읽힌 책은' 안나 카레니나'였다. 지금도 그녀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이유가 가지가지이다.'


그 가지가지의 하나를 만들지는 않겠다는 심정이었을까? 안나 카레니나는 김 여사 곁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웰 다잉'! 김 여사 나이쯤 때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것이리라. 죽음을 두려움 없이 잘 받아들이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 걸까? 김 여사의 웰 다잉은 자신이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고 하나님 품에 안착하는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은 있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의 결과는 묘비명에 무슨 말을 쓰고 싶을까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김 여사는 자신과 사이좋게 잘 늙어 생이 마감될 때 카잔 차 키스의 묘비명을 차용하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써놓고 보니 감히 오만함이 차고 넘친다.   

  

그녀는 삶을 유지하는 동안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혹자는 ‘껄껄껄 하다가 죽다’(~할 걸 망설이다 죽다)의 버나드 쇼 묘비명을 생각하며 살기를 애썼다. .

최근에 그게 오역이라고 해서 그녀는 웃었다. 오역을 주장하는 사람의 해석은 ‘내가 비록 꽤 오래 머물긴 했지만 이따위 것이 결국엔 닥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I knew if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rthing like this would happen.‘)로 되어있다. 실제로 버나드 쇼는 95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여전히 오역의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 카잔 차 키스 묘비명 차용하기 위해서이다.      


은퇴 후 망설임 없이 김 여사가 시작한 건 그림 그리기이다. 고향 작은 시골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그녀를 읍내 미술대회 대표로 참여케 했다.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때 미술에 대해 소질을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이 내적동기로 작동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간 몰입의 재미를 즐긴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상태가 좋다.


알아차림에 머물러 있고 싶다. 무모한 열정을 가지는 일은 이제 삼가려 한다. 욕망은 열정을 낳고 열정은 열심을 낳으며 그 끝은 욕심으로 치닫는다. 그 순간 몰입의 재미와 즐거움이 사라짐을 알아버린 나이가 되었다.


완성된 그림들은 퍼포먼스 날을 잡아 사진 찍고 없애는 작업을 할까 생각 중이다. 김 여사는 그림이 쌓여 마감하는 자신의 생이 타자에게 누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김 여사가 망설임을 만지작거리며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일은 브런치에 글 발행이었다. 김 여사에겐 욕망을 절제하고 욕심을 비우는데 필요한 작업이 글쓰기이다. 낡아져 가는 마음에 다시 색을 입히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글쓰기만큼 좋은 게 없다. 김 여사는 심플한 삶을 살고자 한다. 글쓰기는 차오르는 그녀의 각종 욕구를 비워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어는 순간 갑자기 발동이 걸려 글발이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소리에 뿌듯한 재미와 즐거움도 있으나 그녀의 심연 속에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꺼내 놓고 싶지 않은 의식들을 직면하고 털어버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비워내는 가벼운 삶을 위해 글을 쓴다. 김 여사가 혼자서 비우기를 거부하는 데는 선언(宣言)이 주는 약속을 이행해야하는 강제성 때문이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

  

 김 여사는 예순의 나이를 지나 일흔을 향해가는 지금 처음 살아보긴 하나 꽤 좋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에 잭 니콜슨 마음이다. 은퇴 후 김 여사 동네 중앙공원은 그녀에게 깐부가 되었다. 그녀가 아끼는 플레어 꽃무늬 원피스를 차려입고, 햇살들이 시끄러운 공원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청명한 연두의 나무들, 햇살에 팔락이는 나뭇잎, 뺨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책 속으로 스며든다. 서걱이며 스치는 바람을 얼굴에 맞이하며 나무 사이 명품 하늘도 본다. 플레이리스트에 담겨 있는 비발디 4계 봄을 듣는다. 빨간 머리 안토니오 비발디 신부에게 감탄한다. 여름엔 여름을 듣고 가을엔 가을을 그리고 겨울엔 겨울을 듣는다. 사계절이 김 여사에게로 여백의 시간을 뚫고 가슴으로 온다.    

 

그녀는 지금 목표를 향해 성취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없다. 모든 욕망들- 돈, 명예, 타인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얽매이지 않는 인간관계, 차별과 경계 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바람, 하늘, 나무, 햇살, 달, 별들에 감탄하는 삶을 살고 싶다. 욕망하지 않는 삶? 그녀는 성인(聖人)이라도 되려는 걸까? 당찬 오만함도 가당치 않은 욕심일 수 있다. 김 여사는 겸손해지기로 한다.

감람나무-지혜와 평화 그리고 기쁨 (30호 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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