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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23. 2023

그냥, 좋은 표암

겨울에는 어디를 나다니는 것이 참 쉽지가 않다. 

일단 날씨가 추워서 밖에 오랜 시간 있기 어렵기 때문.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빨리 어디론가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걷는 걸 좋아하는 나 역시도 겨울엔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못 한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특히나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건 고통, 까지 따른다. 편하게 찍고자 맨 손으로 찍자니 손이 금방이라도 얼 것 같고, 그렇다고 두꺼운 장갑을 끼자니 찍기가 불편하고. 그래서 겨울에도 사진을 부지런하게 찍는 사진가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나 역시도 겨울에도 사진을 찍는다.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고 또 많지는 않지만 겨울 스냅도 원하시는 분들이 있기에 종종 촬영을 진행하곤 한다. 


겨울에 야외 스냅을 할 때 가장 고민이 되는 건 배경이 되는 풍경이다. 다른 계절들과는 달리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 이상 쓸쓸함과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지는 풍경은 어쩔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우리 주변엔 생각보다 배경으로 활용하기 좋은 장소들이 꽤 많다. 



경주에는 소나무 숲이 많이 있어서 푸른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촬영을 진행하곤 하는데 그 장소 중 한 곳으로 탈해왕릉과 표암이 있는 동천동을 좋아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나만 알고 싶은, 공간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내겐 표암이 그런 공간 중 하나다. 뭐랄까.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은 곳이랄까. 언덕 위 유허비각 앞에서 시내 일대를 내려다보는 그 순간이 참 좋다. 




이곳 표암은 경주 이 씨의 재실이다. 신라는 박혁거세가 건국시조이지만, 그 혼자 힘으로 신라를 건국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경주의 토착 세력이던 6 촌장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알천 양산촌의 촌장이었던 알평이었다. 신라 건국 후 이 씨 성을 하사 받아 경주 이 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곳 표암은 신라의 고유 합의제도인 화백회의 전통이 시작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형식과 내용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엔 형식이 거의 전부인 줄 알았다.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하세요.라고 하면 당연히 자유롭게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건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저 그렇게 의견을 드는 기회를 만들었다. 자리를 가졌다. 는 것에 의의를 둘 뿐 제기된 아이디어나 문제점은 여러 상황적인 이유들로 유야무야 되거나 이미 질문과 답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화백회의도 만장일치 제도였던 이상 아무런 물밑협상이나 사전합의 없이 진행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더군다나 귀족들의 합의기구였던 만큼 화백회의를 통해 지배층 간의 분열이 생기면 민심이 불안해지고 정국도 안정되지 못할 것은 자명했기에, 화백회의 역시도 난상토론을 통해 의견을 맞춰나가는 과정보다는 이미 합의된 내용을 땅땅땅 도장 찍는 자리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한 때는 요식행위가 중시되는 형식보다, 실질적인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때론 그 형식을 갖추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없이 많은 내용이 채워진다는 것을 삶을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다수에겐 보이는 것, 형식의 중요성이 꽤나 크기 때문. 


봄, 가을 크게 향사가 열린다고 하는데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내년에는 꼭 한 번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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