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4. 고르기 어려우면 그냥 브랜드 커피 마셔.

그녀는 예뻤다.

by 춘춘

고3 때 남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명색이 연애였지만 그래도 학생이었던지라 독서실 앞에서 우동을 사 먹거나 지하철을 타고 영등포역에 가서 피자를 사 먹는 정도가 데이트였어요. 데이트할 만한 장소를 잘 모르기도 했고, 돈도 없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수능이 끝난 어느 날, 커피숍에서 남자 친구의 성당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날이 제가 커피숍에 처음 가본 날은 아니었지만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저에게 커피숍은 익숙한 곳은 아니었어요.


성당에 다니는 그 친구들은 주말 미사가 끝나면 그곳에 종종 모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곳이 그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주눅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그날 만나기로 한 친구들 중 한 여자애는 당시 제 남자 친구가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었던 친구였습니다.


돌이켜보면 학생 시절의 인간관계는 작은 세계 속에 갇혀있는 형태였던 것 같습니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기도 하고, 또 헤어진 애인과 다시 친구가 되기도 하고요. 성인이 되어서 보면 인연을 정리해도 될 것 같은 관계도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날도 굳이 만날 필요 없는 친구들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낯선 공간에서 만났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메뉴를 골랐습니다.

다들 커피를 시키더군요.

그때의 커피숍 메뉴판에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 메뉴가 있었습니다.


블루마운틴, 헤이즐넛, 예가체프..... 읽기도 어려운 이름들이었는데 다들 커피에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상의하며 메뉴를 정했습니다. 저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대체 무슨 커피를 시켜야 촌스럽지 않아 보일지 생각하느라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습니다.


모두가 메뉴를 고르고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뭘 마실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메뉴판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어요. 바보같이 아무거나 하나 달라고 하면 될 것을 고민하느라 타이밍을 놓쳐버렸습니다. 모두들 배려를 해준답시고 정하지 못하는 제게 이것저것 권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제 남자 친구의 옛사랑 여자아이는 제가 커피를 고르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는 듯 친절하고 세련된 말투로 이렇게 말했죠.

"고르기 어려우면 그냥 브랜드 커피 마셔."


저는 그 친구가 골라주는 메뉴를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추천까지 해 준 것을 거절하면 견제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거기서 더 지체하면 우스운 상황이 될 것 같아서 알겠다고 하고 브랜드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날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그 후에 그 여자애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날따라 그 애의 목이 무척 길고 머릿결이 좋아 보였던 것만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브랜드 커피가 커피숍의 메인 커피인 Brand를 말하는 것인지, 여러 가지 원두를 배합했다는 Blend를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 친구들도 그런 건 몰랐을 거예요. 그저 활달한 성격이거나 자주 와본 곳이어석 익숙했거나 그랬겠지요.


제가 대화하는데 조금 더 능숙했다면 '아, 나는 잘 모르겠네, 뭐가 맛있을까?'라고 하면서 다른 친구들이 마시는 걸 따라서 주문했으면 됐을 텐데요.


젊은 날들은 그립기도 하지만 후회되는 날들, 바보 같았던 내 모습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도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니라는 기분이 드는 곳에 가면 주눅이 드는 편입니다. 백화점 명품샵에 가도 그렇고, 값비싼 요리를 대접받을 때도 그렇고요. 단지 나이가 주는 배짱이 조금 생겨서 여유 있는 척하긴 하지만 마음은 그때 커피를 고르지 못했던 어리숙한 내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도 하지만 당황할 때는 그런 컨트롤도 잘 되지 않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몇 년간은 떠올릴 때마다 짜증스러웠던 커피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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