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 이후로 가장 뜨거웠다. 지난 2015년 최고의 인기작이었던 <응답하라 1988>의 시청자들은 극 중 덕선(혜리 분)의 남편으로 정환(류준열 분)을 응원하는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 파와 택(박보검 분)을 응원하는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파로 갈라졌다. 당시 응팔은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예상했던 정환이 아니라 택이 덕선의 남편이라는 결말을 보여주며, 반전 아닌 반전으로 화제가 되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스타트업>도 비슷한 서브 논란이 일었다. 메인 주인공인 도산(남주혁 분) 보다 서브 남주였던 지평(김선호 분)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시청자가 많았다. 사실 <스타트업>에 대한 시청자들의 아쉬움은 서브 논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과한 로맨스 설정, 캐릭터 붕괴, 서브 캐릭터에 서사 몰아주기 등 기존에 많이 제기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글들은 이미 많으니, 나는 드라마 방영 내내 외로웠던 도산파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탄탄했던 도산의 서사에 대해 말하고 싶다.
'겨우 손 하나'가 첫사랑을 이긴 이유
왜 도산이어야 할까? 단순히 이름이 먼저 등장하는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전개를 보면 달미(배수지 분)가 지평이 아닌 도산을 선택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우선, 관계의 시작부터가 다르다. 도산은 하루만 달미를 만나 달라는 지평의 부탁을 받고 샌드박스 입주 조건을 걸지만, 거절당한다. 결국 도산은 아무 대가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편지를 읽고 스스로 달미를 돕는다. 이와 달리 지평은 내키지 않았지만 원덕(김해숙 분)의 부탁으로 달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지평은 15년 동안 달미의 존재를 잊고 살다 원덕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달미를 돕는다. 많은 시청자들이 일명 '서사 몰빵'이라고 외치는 지평의 탄탄한 관계성은 사실 원덕과의 관계이지 달미와의 관계가 아니다.
이뿐 아니라, 달미에게 지평이 과거의 위로라면 도산은 현재의 꿈을 지켜주는 인물이다. 지평은 추억 속의 첫사랑이지만 달미와 도산은 현재의 서로를 변화시킨다. 효율적인 정답만 찾던 도산은 지도 없는 항해의 근사함을 알게 되고, 목표를 이루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달미는 만년 계약직에서 벗어나 고층부 엘리베이터로 갈아타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지평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상호 충족 관계인 도산이 달미에게 더 이상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도산이 계속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시청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달미가 좋아한 도산의 큰 손은 '겨우 손 하나' 정도가 아니다. 달미가 가장 난처했던 네트워킹 파티에서 달미를 초라하지 않게 만들어준 손이고, 해커톤에서 스펙과 경력이 보장된 인재를 두고 달미에게 내민 손이며, 별명이 생불이라던 도산이 달미의 편에서 참지 못하고 대신 화를 내다 다친 손이다.
달미의 현재를 지켜줬던 도산의 손들
그렇기에 15화에 많은 시청자들을 탄식하게 만든 달미의 대사가 더욱 아쉽다. 자신을 왜 좋아하냐는 도산의 질문에 달미는 "사람 좋아하는 데 왜는 없어. 너니까. 네가 이유야. 그게 전부야."(15화)라고 답한다. 물론, 현실에선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이유 따위 필요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다르다. 캐릭터의 감정선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키고 공감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무엇보다 달미의 사랑엔 이유가 분명했다.
시청자들이 사약을 마시게 된 이유
한국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이 서브 남주를 응원하게 되면 흔히 '사약 길'을 걷게 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루어질 수 없음이 분명한 러브 라인을 응원한다는 것은 감정 소모가 크다. <스타트업>에는 유독 이런 힘든 사약을 들이마신 시청자들이 많다. 그렇다면 앞서 말했던 탄탄한 도산의 서사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청자들이 도산이 아닌 지평에게 몰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세 가지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편지의 진실이 너무 늦게 밝혀졌다. 도산은 15년 전,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딱 한 문제를 커닝한다. 그 한 줄을 봤다는 이유로 나머지 아홉 개를 푼 실력은 도산의 머릿속에서 지워졌고 도산의 자존감을 허문다.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도산과 달미의 서사가 탄탄해도, 거짓말이라는 하나의 사실 때문에 이 관계에 몰입하기 어렵다. 하루빨리 진실이 밝혀지고 제대로 된 관계를 다시 쌓았어야 했는데, 편지의 진실은 10화에서야 밝혀진다. 2화부터 9화까지 달미를 위해 노력해 온 도산의 모든 진실은 부정당한다.
둘째, 편지의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 달미가 느끼는 감정선이 너무 많이 생략됐다. 심지어 실수로 밝혀진 진실에 배신감을 느끼는 게 당연한 달미의 감정은 '그래도 일은 해야 한다'는 의연한 CEO 정신으로 묻힌다. 달미와 도산은 어느 순간 다시 사이가 좋아졌고, 15년을 기다린 첫사랑 지평의 고백에도 달미는 흔들리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편지 이후를 너무 얼렁뚱땅 수습하니, 드라마전개는 힘을 잃게 됐다.
셋째, 청춘들의 시작(start)과 성장(up)을 담았다는 드라마의 취지와는 다르게 삼산텍의 성장을 시청자들이 응원할 수 없도록 만든 것도 서브 논란에 한몫했다.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 전, 삼산텍은 지평에게 의지해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지평의 캐릭터를 위해 삼산이(도산, 철산, 용산)들은 상대적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민폐 캐릭터가 된다. 시청자들에게 역대급 답답함을 선사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이들은 3년 사이에 인격적으로도, 실력적으로도 엄청난 성장을 하고 돌아온다. 이 3년 동안이 이들의 성장 과정이었을 텐데, 이 성장 과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갑자기 멋지고 여유로워져 어색하고 낯선 삼산이들만 있을 뿐이다.
삼산텍을 보는 시청자들의 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청자들은 찌질하고 허당 매력의 도산 캐릭터보단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의 멋진 캐릭터인 지평에게 더 익숙하다. 그렇기에 왜 주인공이 도산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방영 내내 스스로 문제를 수습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남자 주인공이 종영까지 4화를 남기고 주체성을 획득한다. <스타트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달미가 진실을 알게 된 후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도산이를 선택했는지에 대해 시청자들을 설득하고, 삼산텍의 성장을 함께 응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평에게 열광했고, 삼산텍은 '느그텍'이 됐다.
시청자들이 서브 캐릭터나 서브 서사가 메인을 이긴다고 느낄 때의 문제가 무엇일까. 메인 캐릭터를 중심으로 모든 사건 전개가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인 한국 드라마에서, 서브 논란은 치명적이다. 작가가 정한 해피엔딩이 시청자들에겐 해피엔딩이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성장한 주인공들이 멋지게 걸어가며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수많은 지평파들이 그들의 성장에 가슴이 뛰기보다는 손잡은 달미와 도산 옆에서 웃고 있는 지평을 보며 찝찝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