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조울증이라니
상담의 시작은 어디에 말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였다. 오늘, 내일 하며 겨우 버티고 살았다.
듣는 이의 조건은 내 이야기를 듣고 같이 우울해하면 안 되고, 내 이야기를 듣고 조금이라도 나를 동정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까다롭지 않은 조건이지만 친구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지역마다 있는 정신건강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맞아주시던 선생님은 따뜻한 차를 내어주셨고 차가 식어가는 동안 긴긴 이야기를 와르르 내뱉으며 마음이 개운해졌다. 이야기를 다 마친 후, 선생님이 하셨던 '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어요' 한 마디가 마음에 꽂혀 엉엉 울었다. 얼마 만에 시원하게 울었던 건지 모를 정도로 나는 잘 울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를 이해해준 그 한마디, 어쩌면 가장 듣고 싶었던 그 말에 수도꼭지가 열린 내 눈물샘은 도저히 닫히질 않았다.
정신건강센터에서는 상담도 해주지만 상담을 하고는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병원도 추천해준다. 프린트해준 근처 병원 중 추천해주신 선생님이 계신 병원은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를 타고 4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정신과에 처음 가보는 나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머릿속으로는 일반 병원과 다르지 않다는 사람들의 말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고 누가 쳐다볼까 봐 걱정스러웠다. 처음 마주한 안내 데스크의 간호사분은 여유롭고 따뜻하게 대해주셨고 미리 예약하고 온 나는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멋쩍게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첫 상담한 날은 정신건강센터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반복했다.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도 계속 눈물이 나서 병원에 있는 곽티슈를 왕창 뽑아 썼다. 이야기를 다 들은 선생님은 문장 완성검사와 대략 400개의 질문이 적힌 성격검사를 권하셨다. 그날 검사지를 들고 병원에서 돌아온 나는 하루를 검사하는 데에 다 써야 했다. 성격검사를 하면서 울거나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다던 분들도 계시다던데 나는 친구와 꺄르르 웃으며 행복하게 마쳤다.
검사 결과는 양극성 정동장애, 흔히들 말하는 조울증이었다. 성격 검사에서 우울도와 즐거움이 평균보다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검사 결과를 들은 날은 상담을 처음 받은 날처럼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내가 그동안 힘들었던 거였구나.' 나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우울증인 줄만 알았는데 내가 조울증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검사를 다시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 이야기하며 돌이켜보았더니 우울해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못할 기분이 들다가도 몇 주 뒤에는 에너지가 넘쳐 일을 벌이던 나였다. 항상 마무리는 흐지부지했고,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모두들 다 그렇지 뭐'라는 생각으로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이 모든 행동들이 조울증 환자의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정신과에 들어가기 전에 눈치 보지도 않고, 아침 약을 매일 먹는 것도 익숙해졌다. 평생 관리를 해줘야 하는 이 질긴 조울증은 내겐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반려 질환이 되었다. 몇 번 내가 너무 힘들어질 땐,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찾아오긴 했지만 나는 멀쩡히 잘 살아있으니 이만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