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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없는 오티

Orientation week

by 카스테라 Mar 23. 2025



개강을 2주 앞두고 오리엔테이션 기간을 가졌다. 약 10년 만에 돌아온 대학교는 얼마나 활기가 넘치던지. 학교 구석구석 들뜬 분위기와 웅성대는 소리로 가득했다. 한국의 오티라 하면, 펜션 하나를 빌려 밤새 죽도록 술을 마시다가 다음 날 아침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라면을 끓여 먹은 뒤 관광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 오는 것 아니던가. 호주의 오리엔테이션은 매우 건전했다.


호주로 오기 전부터 학교 포털 사이트에서 2주 동안 들을 오리엔테이션 수업을 미리 수강 신청했어야 했는데, 제목부터 두근거렸다. ‘호주에서 집 구하는 방법’, ‘에세이를 논리적으로 잘 작성하는 방법’, ‘그린 캠퍼스 투어’, ‘시간 관리와 웰빙’ 등 카테고리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수업을 듣기 전에 알아두면 유용할 만한 내용으로 잘 짜여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수업은 온라인으로도 수강 가능한 수업들이 많아서 오티 기간(O’ week)이었지만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줌으로 오티를 하는 세상이라니. 코로나 이후의 대학교는 급속도로 개인화됐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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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만 오티를 듣다가 심심하던 차에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입학식을 꼭 참석해야 한다길래 학교로 향했다. 구글맵이 알려준 학교까지의 거리는 25분 남짓이었지만,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하다 보니 한 시간이 걸렸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본 창 밖 거리는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그림 같은 집 위로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서울에서 고군분투하던 시간이 억울할 정도였다.


통학길 버스인데도 앉을자리가 있는 것조차 여유로웠다. 호주 출신 연예인들이 모두 햇살 같은 성격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격지심이라면 인정해야겠다. 애쓰지 않아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랜덤으로 누구는 아득바득 살아도 겨우 평균인 나라에 태어나고, 얼레벌레 살아도 그럭저럭 살아지는 나라에 태어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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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 대상 입학식에는 온지구의 인종이 모인 듯이 다양한 학생들로 붐볐다. 공대여서 그런지 거의 인도인과 중국인이 많아 보이기는 했지만, 여기저기서 불어와 독일어, 정체불명의 언어가 한데 섞여 대강의실이 시끌벅적했다. 개강도 안 한 오티 기간인데 벌써 친해진 무리들이 있는지 내 양옆으로는 인도 무리들이 한창 떠들고 있었다.


입학식은 총장의 스피치로 시작해서 유학생 장학생의 스피치, 각종 학생 지원 센터 대표 Q&A, 안전 및 매너 교육으로 마무리됐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학생 지원 센터 대표들의 질의응답 시간이었는데, 교내에 정신 건강을 담당하는 상담 센터는 물론이고 과제 상담을 도와주는 센터와 체육관까지 있었다.


물론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에서는 교내 서비스를 스스로 찾아다니지 않는 이상 자세하게 설명받지 못한 경험이 많아서 생소한 시간이었다. 모든 시스템이 친절하고 구체적이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안전 및 매너 교육 시간에 해변 안전 교육을 한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본인 의견에 대해 발언하고 존중받을 권리와 혐오 발언에 대해 금지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안내해서 좋았다. 학교 곳곳에 무지개 깃발이 걸린 것도, 대명사(pronoun)가 무엇인지 먼저 묻는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도 나에게는 모두 환대와 안전으로 다가왔다.


오티 기간 중 절반은 학교에 나가고 절반은 온라인으로 수강했다. 개강도 안 했는데 벌써 학교에 다니며 힘을 빼기 싫었다. 그래서인지 새로 사귄 친구라고는 ‘그린 캠퍼스 투어’ 때 같은 전공인 걸 알게 되어 번호를 교환한 호주 친구 한 명 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직접 학교에 와서 현지 사람들과 말을 해보니 영어가 얼마나 부족한지도 감이 와서 큰일 났다 싶었다. 어떤 오티 수업은 강의자가 너무 센 호주 악센트를 쓰는 바람에 하나도 못 알아듣고 지나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2주 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법도 배우고, 22개나 되는 학교 건물에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배우고, ADHD와 조울증이 있는 내가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어떤 게 있는지도 배웠다. 술도 없고 친구도 없었지만, 배운 건 너무 많은 오티 기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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