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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선생님 Jun 09. 2024

나는 책 읽어주는 언어치료사입니다.

언어치료실에서 책을 읽어주는 이유.

처음 언어치료 현장에 나왔을 때는, 2010년 11월 무렵이었다. 천안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 자격증 시험을 보았고, 하반기가 되면서 슬슬 동기들이 조기취업을 했다. 조기취업을 하면 아쉬움도 분명 남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기왕이면 빨리 현장에 가보고 싶었다.


4학년 1학기까지 살던 기숙사를 정리하고, 허름한 자취방에서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난 후,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갈 때 즈음 구인공고를 찾아보았다. 요즘은 프리랜서 비중이 많아졌지만, 당시만해도 복지관이나 교육청, 또는 특수학교 등의 정규직 채용 공고가 꽤 있는 편이었다. 기독교 캠퍼스 안에서 늘 기도했던게 있었는데,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이라는 키워드였다. 


구인공고를 보다가 사회복지재단 소속 산하기관의 이름이 보였다. 게다가 그토록 바라던 정규직이었고, 천안에서도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면접을 보는데 기관장님께서 서류를 보시더니 이렇게 질문하셨다. "선생님은 나중에 그럼, 대학원에 가시겠네요? Y대 대학원 붙으면, 여기 떠날 건가요?" "네, 아닙니다!" 당차게 대답을 했지만, 속으로는 '이건 거짓말이잖아' 이러한 외침이 있었다. 


치열하게 공부를 하고, 기숙사와 학교를 오가며 악착같이 공부를 한 이유 중 하나는 대학원 진학이었다. 1-2년 정도 경력을 채우면,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꼭 가고 싶었다. 기관장님의 눈에 욕심 가득한 지원자가 당연 보였을텐데, 나를 합격시켜주셨다. 첫 직장인 만큼, 작은 지역이었음에도 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사회 초년생이 누릴 수 있는 경험을 했다. 


치료사라는 직업 특성 상, 노련함과 경력이 중요했다. 대학교 졸업식을 숨겨야 했던 기억도 떠오르고, 사회 초년생 티가 난다며 무시하는 말씀을 하셨던 양육자분도 기억이 난다. 당시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이 엄마가 되어보니 그 마음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2년의 시간을 현장에 올인할 수 있었는데, 대학 때 기도했던 그대로 그 지역엔 소외된 아이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온 에너지를 쏟아서 아이들을 대했지만 1-2년이 지나면서 점점 번아웃이 찾아왔다. 주말에도 아이들 수업 자료를 만들었고, 작은 동네 안에서 온종일 갇혀있는 듯 일을 했다. 그리고 나는 면접 때의 약속을 어기고 (구두약속이지만) 대학원 진학을 했다. 바라던 인서울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꽤 오래 지나, 아이 엄마가 되었을 때, 아이가 한 해 한 해 커갈 때, 첫 직장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정말 나는 모진 치료사였다. 열정은 많았지만, 아이 엄마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를 출산한 후 일주일에 1-2회 씩 일을 시작했을 때에도 육아로 지친 몸과 마음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출산 후 처음 복직한 곳은 지역 내 사회복지관이었다. 마침 그림책 육아를 시작하던 터라, 학령기 아이들에게도 그림책을 읽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전까지는 언어치료실에서의 그림책은 전래동화나 이솝우화가 전부였던 터라, 책을 찾아보는 과정에도 많은 시간이 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간이 전혀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에너지가 충전되는 듯 느껴졌다. 복지관 언어치료실을 찾아오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40분의 시간이 어쩌면 책을 읽기에 아깝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책을 읽어주고 싶었다.


말이 없어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 시설에서 생활하는 쌍둥이 아이, 책에는 영 관심이 없었던 초등 고학년 아이도 점점 언어치료 선생님이 가지고 오는 그림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개별로, 또 삼삼오오 그룹으로, 그림책을 읽으며 함께 웃고 때로는 울컥하는 마음을 숨기기도 했다.



이렇게 퍼즐이 점점 맞추어가는 것일까? 오래전 기도가 나의 허영심으로 남을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많이 두렵고 숨고 싶었다. 아이들을 수단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는데, 나의 일에 대한 욕심이 나를 번아웃으로 이끌었음에도. 아이들이 힘들어서, 일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포장지를 일부로 씌우려고 했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을 통해 다시한번 나의 소명 중 한 줄을 잡았다. 지금 공부하는 과정 이후에도 나는, 강단에 서거나 유명한 작가, 강연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난의 기준도 애매하지만, 소외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언어치료 선생님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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