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겨울.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능 실패 이후였다. 몸무게는 39킬로 정도였다. 아무데서나 울었고, 울기도 지치게 된 날부터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만 있는 내게, 하루는 엄마가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울음을 터뜨리며 화를 냈다. 이미 시험은 끝났는데 이제와 무엇을 어쩌냐는 거였다. 수능에 실패한데다 불효까지 저지르게 되었으니 살아야 할 명분이 더 궁해졌다. 그 때 우리집은 23층이었다. 나를 완벽히 위로해주는 음악을 들으면 창문 열고 뛰어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천 가자. 기차 타고 가자. 새벽에 서울역에서 만나자."
며칠 후였는지 모르겠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됐어. 너네끼리 가. 아냐, 너도 가야 돼. 몇 차례 실랑이했다. 결국 내 두 발로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한겨울이었다. 나는 비쩍 마른 몸의 나를 데리고, 대여섯 명의 친구들과 겨울 바다에 갔다. 대천역에 내려 대천해수욕장 가는 버스를 탔다. 해변 앞으로 자리 잡은 모텔과 여관, 조개구이집을 헤치고 목적지에 이르렀다.
실패한, 가망성 없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망쳐버린, 인생에서 오직 추락할 일만 남은, 조만간 23층에서 몸을 던져야 할 내 눈 앞에, 바다에 눈이 폴폴 내리고 있었다.
"바다에도 눈이 내리네. 신기해. 처음 봐." 친구 하나가 말했다. "지혜야, 입 벌려 봐. 먹어보자." 혀에 닿는 눈송이. 여자애들의 웃음소리. 나도 친구따라 눈송이를 먹으면서 울다 웃다 했다. 똥구멍에 털 날 거라고 친구들이 놀렸다. 우리는 해변에 있는 바위에 우르르 올라가거나 둘 셋씩 흩어져 칼바람 맞으며 바닷가를 걸었다. 그리고 당일 밤 기차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피곤이 몰려 들었고, 오래 잤다.
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20년 이상을 더 살고 있다. 수능보다 더 큰, 인생의 여러 시험에서 좌절했어도 나의 의지로는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천 바다는 그 날 이후 오늘이 처음이다. 나를 살린 친구들은 모두 어디 있을까. 너희 덕분에, 눈 아닌 빛 내리는 오늘의 대천 바다를 볼 수 있어 고맙고 행복하다 말해주고 싶은데.
2020.6.19. 대천 바다에 앉아 휴대폰으로 쓰고 페북에 올렸던 글. 브런치에 관심 좀 가져볼까 하고. 근데 새삼 쓸 말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