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옆모습을 그리는 화가 박항률의 시적 회화

석기자미술관(228) 박항률 개인전 《달빛과 별빛이 속삭이는 곳》

by 김석
20251104_123344.jpg 기다림,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90.9×72.7cm


1. 옆모습


박항률은 옆모습을 그린다. 그림 속 주인공은 소녀다. 그림 속 소녀들은 앉아서 손에 뭔가를 들고 있다. 꽃이 담긴 화병, 빛나는 보석, 흰 비둘기. 소녀들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다. 무슨 생각에 빠진 걸까. 단아한 모습의 소녀 주변엔 꽃이 피어 있고 나비와 새가 날아다닌다. 고요하고 평온한 세계.


궁금했다. 소녀의 옆모습만 줄기차게 그리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간간이 미술품 경매에 나온 작품을 본 적은 있지만, 박항률의 작품을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다. 알고 보니 2013년 이후 개인전이 없다. 그 또한 이유가 있을 터. 이래저래 궁금하던 차에 가나아트센터에서 박항률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다. 13년 만의 개인전이다.


프로필 사진 2.jpg


2. 추상에서 구상으로


1950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박항률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나왔다. 초기에는 주로 미니멀한 형태와 색채의 기하학적 추상과 오브제 작업을 주로 했지만, 1991년 첫 시집 <비공간의 삶>을 발표하면서 추상에서 구상으로 화풍을 바꾼다. 1970년대 초반부터 시 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병행해 온 박항률은 첫 시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와 그림을 같은 궤도에 올려놓고 작업하기 시작했다.


20251104_123936.jpg


차분하게 사색하는 소녀의 옆모습은 시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박항률이라는 화가를 모르는 이도 ‘어디선가 본 그림인데?’ 하게 되는 건 박항률의 그림이 여러 작가와 시인의 책 표지를 장식했기 때문이다. 최인호의 소설 <몽유도원도>, 정호승의 시집 <수선화에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표지가 바로 박항률의 그림이다. 시집에 잘 어울리는 그림. 박항률과 함께 <裸木에 핀 꽃>을 낸 소설가 박완서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박항률의 작품은 문학적 감수성과 회화적 형상이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내 일생 중 가장 힘들고 참담했던 시절을 그의 따뜻한 그림으로 위로받았다.”


20251104_123427.jpg 저 너머에,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94cm


20251104_123511.jpg 새벽,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72.7×60.6cm
20251104_124226.jpg 새벽,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45.5×37.9cm



3. 상실


박항률은 고교 시절 사촌 누이를 잃었고 대학 시절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다. 가족, 또는 모성의 부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였다. 그 가슴 아픈 상실이 작업의 동기가 됐다. 박항률이 그린 소녀는 세상을 떠난 사촌 누이와 어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박항률의 그림에서 왠지 쓸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소설가 박완서가 그림 속 소녀에게서 본 건 자신의 모습, 자기 얼굴이었을 게다.


오랜 시간 투병하던 아내의 죽음으로 박항률은 한동안 붓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2013년 이후 13년 동안 개인전이 없었던 이유다. 사촌 누이, 어머니, 그리고 아내. 자기 삶에서 가장 가까운 여성들을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 상실감이 쉬이 가늠되지 않는다. 그런 사정을 알고 그림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항률에게 그림은 상실을 극복하는 자기만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20251104_124713.jpg
20251104_124751.jpg


4. 기법


제대로 보려면 만나야 한다. 사람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다. 박항률의 그림은 색감과 질감이 독특하다. 알고 보니 추상 작업을 하던 시절에 쓰던 기법을 지금까지 구사하고 있다는 것. 여러 원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빚은 뒤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키친타월로 닦아낸다. 그런 다음 한지를 이용해 다시 물감을 찍어 낸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여러 겹의 물감을 얇게 쌓아 올리면 그림에서 보듯 남다른 색의 깊이가 만들어진다. 그림에 바짝 다가가 보면 물감을 찍은 흔적이 독특한 결을 이루고 있다.


20251104_123534.jpg 기다림, 2024-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30×30cm
20251104_124217.jpg 소년부처, 2002, 브론즈, 19×27×53cm



5. 법정스님과 인연


대학 시절 몰래 조각과 수업에 들어가 틈틈이 조각을 배웠다는 박항률의 브론즈 작품 <소년 부처>(2002)는 생전에 박항률과 가깝게 지낸 법정스님이 좋아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2000년 길상사를 찾은 박항률에게 법정스님이 진공(眞空)이란 법명을 지어주며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에도 각별한 교분을 이어갔다.


한 번은 박항률이 법정스님에게 단발머리 소녀를 그린 그림을 선물했더니 법정스님이 그 소녀에게 ‘봉순이’라는 애칭을 붙였고, 그 뒤에 박항률이 만든 <소년 부처> 조각을 보고는 “봉순이에게 오빠가 생겼다”며 ‘봉순이 오빠’라는 애칭을 붙여줬다고 한다. 생전에 많은 예술가와 돈독한 교분을 나눈 법정스님과의 인연이 박항률의 작품을 달리 보게 한다.


20251104_123717.jpg 저 너머에,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5×162cm



6. 명상


박항률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명상(瞑想)’이다. 왜 아니겠는가. 상실의 아픔을 가슴 속으로 삭이며 견디고 이겨내야 했던 그가 명상의 세계에 기댄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세상을 떠난 사촌 누이와 어머니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 점차 보편적인 인간상으로 변모한다. 궁극적으로 그림 속 소녀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었다.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그린다는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다른 사람을 모델로 그리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그리는 것이다. 내 존재에 대한 다양성을 드러내고 비쳐본다고 할 수 있다. 내 속에는 소년도 있고 소녀도 존재한다.”


20251104_123810.jpg
20251104_124343.jpg


7. 달빛과 별빛이 속삭이는 곳


전시 제목 ‘달빛과 별빛이 속삭이는 곳’은 박항률이 2020년에 발표한 시집 <별들의 놀이터>에 실린 시에서 따왔다. 가나아트센터 1층 한쪽에 있는 ‘스페이스97’이란 이름의 전시 공간은 두 곳으로 나뉜다. 입구에 들어서면 나오는 첫 공간에는 올해 완성한 최신작을 중심으로 박항률의 회화 16점이 걸렸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또 다른 전시 공간에선 회화와 조각, 드로잉, 표지화를 장식한 소설과 시집, 박항률의 시집을 볼 수 있다.


■전시 정보

제목: 박항률 개인전 《달빛과 별빛이 속삭이는 곳》

기간: 2025년 10월 24일(금)~11월 16일(일)

장소: 가나아트센터 1층 스페이스97 (서울시 종로구 평창30길 28)

문의: 02-02-720-1020


20251104_124854.jpg

#석기자미술관 #박항률 #개인전 #소녀 #옆모습 #상실 #그리움 #가나아트센터 #스페이스97

keyword
작가의 이전글화가 나혜석이 남긴 단 하나의 유품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