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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이 May 12. 2023

인생일기 17.

그때 나 좀 서운했다...!

기운이 없으면 물건이 두 개로 보인다. 걷기 운동을 할 때 먼 곳을 보면 흔들려 보이거나 모든 것이 두 개로 보였다. 그럴 때는 하는 것을 멈추고 쉬었다. 잘 먹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엄마는 통화할 때마다 “우리 딸 오늘은 많이 먹었어?”라고 묻고, 아빠는 “암튼 건강해야 한다.”라고 하신다. 그 말에 대부분 “응”이라고 대답하는데, 사실은 아닐 때도 많다. 먹고 싶지만 먹히지 않고, 억지로 먹다가는 토할까 봐 못 먹겠다.


요양병원 원장님께서는 단백질 음료를 마시고, 식사나 간식 시간 외에도 다른 것을 조금씩 먹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과일도 먹고 단백질 음료도 마시고, 부드러운 빵이랑 요플레도 먹었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밥. 음식에서 냄새가 나고 식욕이 생기지 않아서 약을 부탁드렸더니 처방해 주셨다. 그래도 전과 비슷해서 많이 먹지는 못했다.

밥을 못 먹으니 뉴케어라도 천~천~히~ 드링킹...


결국엔 몸무게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보통 10~15킬로 정도는 빠진다고 했는데, 살이 너무 빠지니까 불안했다. 3차 항암 후 다시 입원할 거지만, 그전에 잠깐 퇴원을 해야 해서 먹거리가 제일 걱정이었다. 요리책을 봐도 쉽지 않았다. 평소에 요리를 잘 안 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잘해 먹어야 하는데...

드디어 퇴원하는 날. 병실 언니들이 축하파티를 해주었다. 저번 생일 파티 때처럼 소박하게, 하지만 많이 웃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항암 주사를 맞고 어차피 또 입원을 해야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 좋아서 고마웠다.  


집에 오니 편안하고 아늑했다. 집에 오면 해야 할 일이 보여서 더 힘들다고 하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그리고 병원에서와 달리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병원 침대가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불안한 생각에 잠을 자주 깼었는데, 집에 와서는 전처럼 밤에 잠들어 아침에 깰 수 있었다. 그리고 먹는 것도 좋아졌다. 병원에서처럼 매일 다른 반찬을 먹을 수도 없고, 특별한 맛이 나는 반찬도 아니었지만, 좀 더 잘 먹혔던 것 같다. 집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배에 난 상처를 보여줬는데, 저번에 봤었다며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내 기억으로는 봤더라도 자세히는 못 봤을 텐데 징그러워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상처받았다. 수술한 상처를 보는 것이 안타깝고 징그러워도 힘들었을 내 마음을 좀 읽어주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그리고 없는 솜씨에 위암 환자가 먹을 수 있는 반찬도 만들어야 하고 이것저것 신경 쓰였는데, 마트만 함께 가고 음식 만들 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요즘 자주 보는 먹방에서 유튜버들이 엄마가 해주신 김치라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부러웠다. 우리 엄마는 멀리 살기도 하고 내가 위암이라 잘 먹지 못하지만, 해달라고 하면 아마 뭐라도 해주셨을 거다. 하지만 성격상 그런 말을 못 해서 그냥 내가 해 먹는 게 맘이 편했다.

어쨌든 레시피를 보고 따라서 만드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편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설거지도 나중에 한다며 방치해서 결국엔 시어머님이 하셨다. 그리고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한다며 일찍 자라고 잔소리만 하고. 너무 듣기 싫었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검게 변해가고, 손가락은 저릿저릿해서 되도록 찬 것도 만지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죽는시늉을 해야 알아먹으려나? 그냥 어떻게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도 하고 혼자 씻고 하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남편도 전과는 달라진 상황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팔뚝과 다리에는 전보다 더 많은 각질이 일어나고, 식사 후에는 음식이 잘 내려가도록 기대서 휴식도 취해야 하고, 약도 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나는 환자인데 너무너무 서운하고 눈물이 났다.

힘들어도 짜내본다. 긍정의 힘!(한 때 핸드폰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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