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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atre Romance Feb 08. 2024

장바구니를 끄는 할아버지들

24개, 미아사거리

겨울이 오고, 오토바이로 출근을 할 수 없게 된 이후부터 8시 출근을 시작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일말의 인류애를 보존하려면 9시 출근길에 나서는 사람들을 피해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한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지하철을 타러 서울역으로 향하던 어느 날 이상하게 문득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옆을 바라보니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모두들 바퀴가 달린 시장가방을 끌고 계셨다. 처음엔 그저 지하철을 타러 가는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이상함을 인지하고 살펴보니 모두 같은 가방을 끌고 계셨다. 가방들은 한결같이 꾸역꾸역 집어넣은 짐들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바퀴 달린 가방을 안 끌고 나온 할아버지 또한 동일하게 터질 듯한 백팩을 메고 계셨다. 할아버지들끼리는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 불을 기다리는 동안 할아버지들이 차례로 도착하는 대로 서로 눈인사를 하는 등 아는 체를 했기 때문. 그렇다고 친한 사이들은 아닌 것 같았다. 아는 체는 늘 짧게 끝났고 대화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동일한 상황을 며칠간 반복하던 차에 어느 날은 대화를 하시는 것처럼 보여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할아버지들 곁에 바짝 섰다. 쌩쌩 달리는 차들의 소음 때문에 겨우 알아들은 대화는 이것.


“오늘은 몇 개나 돼?”

“24개 밖에 안돼. “

“많네”

“나는 오늘 미아사거리”


그리고 파란불이 반짝, 할아버지들은 직진순재마냥 빠르게 움직이셨고 귀동냥은 짧게 끝났다. 24개, 미아사거리. 가방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가 24개라는 소리일까? 그걸 들고 미아사거리로 가야 한다는 뜻일까? ‘많네’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묘한 부러움이 느껴졌다. 대체 이 할아버지들은 무엇을 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장바구니를 끄는 어르신들에 대한 호기심 덕에 아침 출근길에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귀를 쫑긋 세우고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며칠 뒤에는 어떤 할머니도 비슷한 시장바구니를 들고 잰걸음으로 종종 지하철로 향하고 계셨다. 가방이 조금 열려있는 것처럼 보여 할머니 곁에 바짝 붙어 걸어가며 가방 속을 들여다봤다. 물건들에 배달주소가 찍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인들이 이렇게 새벽같이 서울역에서 물건을 받아 배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지 추측도 안되고 궁금증이 완벽하게 풀리지는 않았지만 어찌 됐든 그들은 ‘일’을 하고 계시는 듯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는 나와 같이.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들도 일을 하며 아마 생의 활기를 느낄 것이다. 사회에서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것에 보람과 위안을 가지고 또 안심하게 될 것이다. 할 일이, 어딘가에 나의 쓰임이,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니까. 개인적으로 노년의 회색 빛 삶에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노인들은 젊어 봤지만, 나는 아직 늙어보지 못했고, 그렇기에 노년의 삶은 타인의 삶을 통해서만 추측하고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또 노년의 내 모습을 비춰보게 된다. 나는 어떻게 늙어가고, 또 어떤 노년의 삶을 살까. 여전히 노년의 삶은 두렵고 무섭지만, 이상하게 횡단보도 앞에서 할아버지들을 마주치면 그래도 내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띠게 된다.


오늘 아침에도 할아버지들과 함께 공항철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덕분에 오늘 아침도 조금은 웃게 되었고, 이상하게 정말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봄이 오기 전까지 이들과 자주 마주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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