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의무라고?

'신성'이라 쓰고 '억압', '착취'라 읽는다

by 야생

좀 늦은 감 있는 첫눈이다. 얼마 전부터 첫눈을 기다렸다. 첫눈이 오면 마음껏 좋아하리라. 언제부터인가 눈 내리는 것이 좋기도 하였지만, 불편하기도 했다. 미끄럽지 않을까, 질척거리지 않을까, 눈과 함께 걱정 근심도 소복이 쌓여갔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날마다 가던 동네 산에도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미끄럽지 않을 거라는 그의 말에 이끌려 눈 내리는 산을 올랐다. 정말 걱정했던 만큼 미끄럽지 않았다. 생각과 실제가 이렇게 다르다니. 그동안 생각 속에 머물러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고.



옛날엔 그러지 않았는데


눈꽃 핀 산속을 걸으며, 30년도 더 된 옛날 일이 떠올랐다. 눈꽃, 얼음꽃, 그리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라산 정상을 향하여 한 발씩 걸음을 옮겼던 기억이다. 한라산 입구에서는 입산을 제한했었다. 그러나 친구와 나는 겁도 없이 아이젠까지 빌려 신고, 인적이 끊긴 산을 올라갔더랬다. 눈 속을 뚫고 다다른 백록담은 얼마나 감동이었던가.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와서는 어떤 산사의 문을 두드려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다. 새벽에 먹은 절밥, 스님들은 설거지하듯 밥을 먹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뒤돌아 보면 20대에는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내 모습은?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 투성이다. 물론 아줌마 파워가 붙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마냥 파워풀한 모습만은 아니다. 아줌마가 되어 더 쪼그라든 점도 많다.


나의 친구는 요즘 불면에 시달린다. 그런데 결혼 전에는 잠탱이었단다. 그녀가 불면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부터란다. 찌찌뽕! 나도 아이를 키우면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다 자란 지금도 마찬가지다. 조그만 기척에도 눈이 떠진다. 모두가 잠들지 않으면 선잠을 자게 된다. 엄마병, 주부병에 단단히 걸린 것이다.


엄마들 걱정이란 것이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다. 자식 걱정, 남편 걱정, 시댁 걱정, 친정 걱정이 대부분이다. 엄마들은 왜 이렇게 가족들의 모든 짐을 지고 살아가는 걸까. 결혼한 지 20년이 넘고 나이 50이 넘으니, 이제야 비로소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인형의 집> 노라가 되고 싶다.



신성한 의무란 게 뭐지?


헬머: 그것을 꼭 말로 해주어야 안단 말이요?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의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노라: 제게는 그 밖에도 똑같은 신성한 의무가 있어요.

헬머: 그런 게 있을 리 없소. 대체 어떤 의무가 있다는 거요!

노라: 저 자신에 대한 의무예요.

헬머: 첫째로 당신은 아내며 어머니요.

노라: 이제는 그런 것을 믿지 않겠어요. 무엇보다도 먼저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신성한 의무라! 신성하고 신성하지 않은 걸 누가 정하지? '신성함'이라는 말은 역사상 권력자들의 언어가 아니었던가. 힘없는 사람들을 부려먹기 위한. 그들은 '신성'이라 쓰고 '억압'과 '착취'라고 읽었다. 나는 바보스럽게 '신성'이라 쓰고 '신성'이라 읽었다. 그들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지금은 내가 좀 똑똑해졌다. 나도 '신성'이라 쓰고 '억압', '착취'라 읽는다. 그들이 씌운 신성한 의무를 벗고,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