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이젠 내 문제가 아니라니까

남편들이여, 아내의 마음을 아는가

by 야생

아내의 잠


한밤에 문득 잠 깨어

옆에 누운 이십 년 동안의 아내,

작게 우는 잠꼬대를 듣는다.

간간이 신음 소리도 들린다

불을 켜지 않은 세상이 더 잘 보인다.


멀리서 들으면 우리들 사는 소리가

결국 모두 신음 소리인지도 모르지.

어차피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

그것 알게 된 것이 무슨 대수랴만,

잠속에서 작게 우는 법을 배우는 아내여,

마침내 깊어지는 당신의 내력이여.


마종기 <그 나라 하늘 빛> 중에서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어난 시인은 20년 침식을 같이 했던 아내의 잠꼬대를 듣는다.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 소리 같기도 하다. 그는 아내의 잠꼬대 소리를 '우리들 사는 소리'로, '모두의 신음 소리'로 치환한다. 사람마다 시기마다 그 강도와 밀도가 다를 지언대, 그는 아내의 신음소리를 도매금으로 넘기고 있다. 살짝 기분이 언짢다. 시인은 잠에서 깬 아내에게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길래 그렇게 신음소리를 내었느냐고, 상심한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봤을까.




나도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다. 우리는 남들 보기에 별 문제없는 사이였다. 주말이면 항상 붙어서 장을 보러 다니고,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솔선수범하여 장바구니를 척척 옮기고.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이 동네에서 가장 사이좋은 잉꼬부부라고. 나의 의식은 그것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 맞아! 내 남편만한 사람 없지. 이만하면 결혼 잘한 거지, 뭐.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달랐다. 꿈속에서 그는 나를 혼자 남겨두고 어디론가 가버린다. 꿈속 배경은 일본의 어느 낯선 기차역이다. 나는 어떤 열차를 타야 할지 애를 태우기도 하고,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혹은 어떻게 갈아타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는 모습이다.


이렇듯 나의 의식과 무의식은 괴리된 상태였다. 왜 이렇게 달랐던 걸까. 20년 이상 침식을 같이 해도 그가 남의 편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뭘까. 정서적 교류가 없었기 때문일까. 맞다, 나는 그의 감정을 살폈던 반면, 그는 나의 감정을 돌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나만 감정 노동을 했던 것이다.




감정 노동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 그녀가 무슨 말만 하면, 그녀의 참모들은 그녀의 머릿속을 들락날락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또한 그녀의 마음을 살피고 또 살폈더랬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알아서 척척! 근데 박근혜도 참모들의 생각과 마음을 살폈을까. 권력을 가진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서 다른 사람을 살폈으랴마는. 권력이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살펴야 된다. 생존을 위해서.


알고 보니 나도 박근혜의 참모들처럼 살았었다. 남편이 말 한마디 툭 던지면, 알아서 척척! 내가 이렇게 살았다 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겉으로는 내가 더 큰 소리를 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 깊은 곳은 달랐던 거다. 남편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고. 그러니 우리 사이에 어디 정서적 교감이 오고 갔겠는가. 버려진 느낌만이 내 깊은 속을 채우고 있었던 거다.


가부장 사회와 자본주의가 손잡고, 전업주부인 나에게 그동안 횡포를 부렸었다. 남편도 권력자로 거기에 가담했던 거고. 이것을 꿰뚫어 보니, 벗어날 길이 보였다. 이제 난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남편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 혼자 허둥지둥하는 그런 꿈.




그런데 그는 여전히 옛날의 나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식탁에서였다. 큰 딸이 아빠는 다른 사람 배려하지도 않고 먹는다고 한마디 했다. 그랬더니 그는 마음이 상했는지 평소에 하던 설거지도 안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옛 습관이 나타난 거다. 옛날 같았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일을 수습하고, 그의 마음을 달래며 풀어주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다음날 평소와는 달리 그에게서 퇴근한다는 연락이 없었다. 그의 오래된 수법이다. '내가 화가 나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메시지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오래간만에 애들이랑 햄버거로 저녁을 해결했다. 여느 때처럼 퇴근한 그는 먹을 것이 없었다. 결국 그 스스로 라면을 끓여먹고 설거지까지 했더라는. 자업자득이다.


바보야!
너의 그런 모습,
이젠 내 문제가 아니라니까.


서로 감정을 보살펴주고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일방적인 감정노동은 권력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와의 평등한 관계를 위해 감정노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나의 잠꼬대 소리를 듣고, 나의 마음을 물어보고 헤아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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