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별거 아니라고?

빨아준 옷만 입는 사람은 모른다

by 야생

속이 미식거린다.

'날 건드리기만 해 봐. 확 토해버릴 거야.'

이런 나를 바라보는 그도 꽤 속이 불편했을 거다. 2019년 추석 즈음 우리 둘 사이에 맴도는 긴장감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때 세탁기와 건조기를 구입했다. 한꺼번에 몇백을 쓴 거다. 옛날의 나였다면 건조기는 안 샀을 거다. 빨고 말리고 개서 각각의 서랍에 정리하는 것, 오랫동안 당연하게 해온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당연하지 않았다.


건조기를 장만하니 빨래 걱정이 사라졌다. 수건이든 속옷이든 겉옷이든 제때 빨아서 말려야 한다. 햇빛이 쨍쨍한 날을 골라서 말이다. 때를 놓치고 비라도 오면 곤란하다. 여벌 옷도 살펴야 한다. 날마다 입고 벗는 것이 일상이라 여분이 없으면 그것 또한 낭패다. 남이 빨아주는 옷만 입는 사람은 이 고충을 모를 거다. 그래서 간혹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집에서 뭐해? 놀고먹는 것 아냐?"

주둥이를 콱 쥐어박고 싶다.


빨래,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건조기를 산지 1년 6개월, 우리 집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나는 거의 빨래에서 손을 뗀 상태다. 빨래 바구니에 빨래가 가득 차면,

"첫째야 빨래 좀 세탁기에 돌려. 그리고 막내야 너는 키가 크니까 세탁 다 되면 건조기에 넣고."

시키기만 하면 된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꺼내오는 사람은 필요한 사람이다. 소파 위에 부려 놓는다. 필요한 사람마다 가져다 입는다.


한동안 둘째가 빨래를 갰던 적이 있다. 밤늦게 음악을 들으며 빨래를 개는 것이 힐링이 된단다. 옛날 할머니들이 보았다면 고추 떨어진다고 했겠지. 남자든 여자든 엄마든 아빠든 애들이든 누구든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나는 여태껏 빨래를 나만의 일로 규정해 왔을까.


가끔 애들이 자기 속옷이 없다느니, 양말이 없다느니 나한테 하소연한다. 옛날의 나였다면, 미안해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당당히 말한다.

"왜 나한테 그걸 말해? 필요하면 빨아서 입어."

아이들은 더 이상 말이 없다. 엄마가 도맡아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는 눈치다.


불편함을 외면하라


이런 변화는 단숨에 오지 않았다. 깊이 내면화된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 생각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 했다. 그것은 쉽지 않았다. 어색하고 힘들었다. 자기조차도 자기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도 문제였다. 최근까지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옛날에 양말이나 속옷이 떨어졌을 때, 그것 하나 제대로 못 챙기냐고 그가 나를 타박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빨래 더미를 볼 때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불편한 마음을 애써 모른 채 했다. 그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새벽 출근길 산더미 같은 데서 양말을 찾아 신고 가더라. 나의 외면과 그의 침묵은 내가 빨래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일등 공신이다.


빨래를 개는 그, 여전히 황송한 나


어느새 그도 많이 달라졌다. 주말에 거실 바닥에 빨래가 쌓여 있을 때, 그는 식구들의 모든 빨래를 개어놓는다. 집안일을 나의 일로 규정하고,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약간의 불평과 짜증과 비난을 했었는데. 묵묵히 다른 사람의 빨래까지 개고 있다니! 1년 6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난 그의 변화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 가지 옥에 티! 빨래를 개고는 우리를 재촉한다.

"자기 옷, 빨리빨리 가져간다!"

부드러운 듯, 부드럽지 않은 듯. 그의 마음속을 살짝 들여다본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지만. 내게 보이는 것은 이렇다.

'내가 빨래까지 개어놓았는데, 빨리빨리 가져가지 않고 뭣하고 있어?'

그의 지시에 순발력 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 시혜가 거두어질 것 같아 재빨리 움직이는 내가 있다. 그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가. 그가 빨래를 갠다는 사실에 나는 여전히 황송해하는 걸까.


빨래! 별거 아닌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하찮게 볼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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