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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Apr 17. 2024

엄마에게 도시락을 싸줄 수 있다면...

국민학교 시절 엄마는 학교에서 달음질로 3분 거리에 살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잰걸음으로 집까지 걸어와  외할머니가 쥐를 피해 매어 달아 둔 소쿠리에서 찬 밥을 꺼내고 우물물을 퍼다 말아 김치 하나 두고 먹는 게 보통이 이었다. 가끔 점심을 챙겨 오지 않은 친구를 데리고 와 찬 없는 밥상을 나누기도 하고 겨울에는 아랫목에 밥을 넣어두러 오는 친구들과 구들방에 둘러앉아 먹기도 했다.  외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물만밥에 김치도 귀하던 시절이기에 점심은 언제나 꿀맛이었지만  도시락을 싸 오는 친구들이 부러워 엄마는 집이 코 앞인 게 못마땅.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은 마치 내 기억인 양 가슴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들어앉아 있다. 그 안의 나는 무명 교복을 입고 책보를 허리에 맨 단발머리 소녀가 되어 학교로 뛰어간다. 점심시간이 오면 소금을 넣은 주먹밥이나 보잘것없는 찬이라도 도시락을 꺼내는 아이들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다시 집으로 내달린다. 툇마루에 앉아 꽁보리밥에 열무를 비벼 맛나게 먹는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중학생 딸아이의 도시락을 싸고 있자면 종종  어린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면 나는 정성스레 도시락을 싸서 학교 가는 엄마의 책보 안에 넣는 상상을 해본다. 사각 양은 도시락에  지은 하얀 쌀 밥과 예쁘게 말아낸 계란말이며 장조림, 나물반찬을 넣고 깨끗한 무명 보자기로 단단히 여민다. 혹은 그 시절과 어울리지 않겠으나 성능 빵빵한 보온 도시락에 엄마가 좋아하는 미역국이며 두부, 호박, 깻잎 전을 반찬으로 넣어 예쁜 도시락 가방에 담는다.  도시락을 꺼내놓고 친구들과 깔깔 웃고 떠들며 반찬을 오물거리는 작은 여자아이가 마음속 앨범에 흑백 사진처럼  새겨진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삼 남매의 도시락을 싸던 엄마는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며 대가족 살림을 돌보느라 늘 잠이 부족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눈에 바람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는 엄마의 표현은 내가 엄마의 나이가 되어 아픈 몸으로 불면의 밤들을 지샌 후에나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이 전에는 무심히 넘겼던 엄마의 이야기들은 나의 아이가 커갈수록 더욱 생생해진다. 엄마가 지나온 투쟁 같던 삶이 내 안에서 빛이 되어 살아난다. 결코 녹록지 않았을 세월을 떠올리면 심장이 시리고 아릿하다. 하지만 짐작건대 그 힘듦의  사이마다 갈라진 틈에서 빛이 새어 나오듯 찬란하였을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신나게 골목길을 내달리던 아이가 뿜어내는 순수하고 밝은 에너지.   찬연함이 어렴풋하면서도 닿을 것만 같다.  


 은빛 머리를 하고 나의 아이보다 작아진 엄마는 핸드폰 안에서 나를 보며 하얗게 웃는다. 오늘도 안녕하냐고 물으신다. 이른 아침 의 도시락을 싸며 오늘도 떠올린다. 영화처럼 타임 슬립을 해 어린 엄마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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