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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Dec 25. 2021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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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이이잉...위이잉... 위이잉...
잔디 깎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방음용 이어머프를 한 정원사가 바퀴 달린 예초기를 밀고 지나간다.
   ‘아...하필이면...지금이람...”
이제 막 단잠에 빠져들었는데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을 때와 비슷한 짜증이 밀려왔다.
 
 아침부터 유리보다 투명한 하늘에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지난주에 도착한 신간들 중에 가장 고대하던 소설집 한 권을 골라 들고 단골 카페를 찾았다.  나의 지정석인 빨간 쿠션이 깔린 라탄 의자에 앉아 향기로운 소이라떼 한 모금을 마셨다.
   ‘역시 커피는 밖에서 마시는 거야…’ 생각하며 나는 책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첫 이야기는 <Le jour ou pluie viedra>  라는 샹송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딱 내가 좋아하는 전개이다. 이렇게 책 속에 음악이나 노래가 언급되면 나는 언제나 이어폰을 꽂고 그 곡을 들으며 책을 읽곤 한다.  그러면 마치 영화 속에 들어가 구경을 하듯 책을 더욱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 걸맞게 샹송을 들으며 책을 읽으니 어느새 나도 주인공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듯했다.
 
 서서히 주인공의 눈과 발, 의식을 따라가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던 찰나에 제철소에서나 들릴 것 같은 커다란 소음이 나를 현실 세계로 소환한 것이다. 소음에 민감한 나는 이 상황에서 다시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원사 아저씨가 건물 반대편 화단 쪽으로 갈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지 생각했다. 커피 잔에 다시 입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는 동시에 싱그러운 풀 냄새가 들숨과 함께 폐부로 가득 밀려들어왔다. 공기에 담긴 냄새는 종종 내게 타임머신이 되곤 한다.
 




   ‘맴맴 맴맴’


매미 소리가 요란한 들판에 나는 어쩔 줄 몰라하고 서있었다.
오늘은 5학년 1반 전체가 학교 근처 들판으로 소풍을 나왔다.


   “반장, 마이크랑 스피커 준비됐어?”
   “아… 그게… 제가 오늘 깜빡하고 챙겨 놓은 가방을 두고 왔어요 선생님.”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이크가 있어야 장기자랑 시작을 하지, 정신을 대체 어디다 두고 온 거야.”


 젊은 담임 선생님은 살짝 눈을 흘기시며 말씀하셨다. 반 아이들도 모두 실망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노래와 춤을 장기자랑으로 준비한 조들은 음악을 틀고 노래를 부를 장비가 없다는 소식에 적잖이 김이 빠진 눈치였다.
 
   ‘아... 내가 왜 오디오 장비를 가져오겠다고 했을까…’

 

놓고 온 실수보다 가져오겠다고 번쩍 손을 든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얼마 전 아빠는 스피커와 마이크가 달린 휴대용 가라오케를 선물해 주셨다. 집에 있는 전축과 달리 휴대가 가능한 그 신문물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나는 학급 회의에서 소풍날 가져오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전날 밤 꼼꼼히 챙겨서 현관 옆에 세워두고는 다음 날 아침, 도시락 가방만 들고는 휑하니 학교로 뛰어와 버렸다. 빈 손이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얼굴이 벌게져 식은땀을 흘리며 서있는데 들판을 지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스쳤다. 바람에 가득한 풀 내음이 어찌나 강렬한지 잠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 반장, 저기 너네 아부지 아니야?”

지영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 들판 너머 낯익은 까만 차 한 대가 서있었다. 초록 들판 사이 오솔길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정말 아빠였다.
하얀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한쪽 어깨에 내가 챙겨 둔 짐 가방을 올려 멘 채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11살 인생 그때까지 본 아빠 중 가장 듬직하고 반가웠던 것 같다. 아빠는 선생님께 늦어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마이크와 스피커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그리곤 반 아이들에게 쭈쭈바 보따리를 건네주셨다.
 
   “딸, 집에서 보자.”  

손으로 내 머리칼을 흩뜨리며 아빠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눈물이 핑 도는 것도 같았다


 




 잔디 깎는 소리가 어느덧 잠잠해져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30년 전의 나, 세상 누구보다 든든했던 젊은 아빠를 만나게 해 준 한 자락 바람, 풀 내음 그리고 정원사 님이 고마워졌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나는 읽던 책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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