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별 Dec 28. 2021

꽃비가 내리던 날

시야가 흐릿하다.
주책없이 눈물은 샘솟듯 퐁퐁 올라온다. 


남자 친구와 한바탕 싸우고 시티 한복판 조지 스트릿 극장 앞을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걸어가고 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시드니라는 사실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


20미터 앞 어딘지 낯익은 실루엣이 보인다. 


   ‘누구지?’


이런 몰골로 아는 사람과 마주치는 건 피하고 싶었다. 뇌를 풀가동한다. 서서히 다가오는 실루엣의 주인공을 알아내려…


15미터… 


   ‘설마…’


10미터


   ‘진짜?’


5미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만다.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던 그도 나를 알아본 게 분명하다.  


 

 기타를 잘 치던 아이.  

16살 고등학교 1학년 우리 반 혁이가 저만치 앞에 멈춰 서있다.   

교정을 둘러싼 벚나무에서 하얗고 발그레한 꽃잎이 날리던 봄.


 16살 아이들의 마음에도 꽃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점심 종이 울리면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해치운 남자아이들은 공을 차겠다고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고 여자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조르르 창가에 매달려 눈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재잘대거나 캔커피를 마시러 매점으로 향했다. 종종 그 풋풋하고도 소란스러운 적요를 깨고 귓가로 스며드는 소리가 있었다. 혁이의 기타 소리. 교회 고등부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혁이는 연습이 있는 날이면 학교에 기타를 가지고 왔는데 그런 날에는 아이들의 요청으로 한 두 곡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치 곤했다. 봄바람에 교실 커튼이 펄럭였고 창밖엔 초록 잎들이 살랑거렸다. 노래를 잘 불렀는지 어떤 곡을 연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창을 등지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혁이의 모습이 어쩐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늑장을 부리다 셔틀버스를 놓치고 터덜 터덜 교정을 내려가던 날이었다. 뒤에서 자전거를 끌고 오던 혁이가 말을 걸었다. 


   “태워줄까?” 


   “됐거든. 우리 집 멀어. 그리고 나 정말 무거워. 후회하지 말고 그냥 가지.”


   “나를 뭘로 보고. 걱정하지 말고 타봐. 어두워지는데 언제 집까지 걸어가.”


 

 그랬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가려면 30분이 넘게 걸릴터였고 주변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도 몰랐고 누구 뒤에 타 본 적도 없어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망설이다 살며시 자전거 뒷자리에 앉았다. 

학교 앞은 약간 내리막 길이어서 혁이가 발을 떼자 자전거는 생각보다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혁이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초저녁의 봄바람에선 꽃향기와 탄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흩날리는 머리칼에 뺨이 간지러웠다. 눈을 감자 바람과 바람의 냄새를 온 세포로 느낄 수 있었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눈을 감아 깜깜한 세상 속으로 노란빛이 새어 들어 스윽하고 지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시간이 정지된 듯도 했고 심장이 간질간질한 것도 같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혁이의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무안함에 귀가 뜨근해져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야! 거봐. 후회할 거라고 했지?”


   “아니야, 정말 가볍던데. 혼자 탄 줄 알았다니까”


   “으이그 땀이나 닦고 말하셔.” 


 혁이의 너스레에 나는 웃으며 휴지를 꺼내 주었다.  그날 이후 그와 나 사이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고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사귀기로 했다. 사귄다는 단어가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접착 메모지에 짧은 편지나 좋은 글귀 따위를 주고받았고 가끔 탄산음료를 마시며 집까지 걸어간 것이 다였으니까. 혁이는 그 이후 다시 자전거를 태워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설렘은 벚꽃이 지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런 나의 변덕으로 혁이와의 교제는 손 한번 잡아보지 않은 채 싱겁게 끝이 났다. 한동안 침울한 표정을 하고 슬픈 노래를 부른 것으로 보아 혁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 수는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심장이 간지러워지지 않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머뭇거리던 그가 다가온다. 기타를 잘 치던 16살 소년은 26살의 청년이 되어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눈물범벅 진상 얼굴을 하고 수년만에 그것도 시드니 한 복판에서 만난 그에게 던진 한마디.


     “으이그… 눈물이 나 닦고 말하셔…” 혁이는 휴지를 내밀며 말한다. 


 나는 그 순간 어정쩡하고도 이상한 재회에 웃음이 터져 나왔고 휴지를 받아 눈물을 닦았다.  


그 우연한 만남 이후로 나는 혁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왜 바로 그때 그 길 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는지 '우연'이란 단어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 느낌이다. 그저 신비로운 우주의 장난 같다고나 할까.

 또다시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극장 앞을 지날 때면 가끔 그날의 만남이, 우주의 장난이 떠오르곤 한다.


혁이와 그의 기타, 자전거, 꽃비가 내리던 교정, 가로등 따위의 기억과 함께. 


         

이전 08화 애틀래틱 카니발 데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