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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Dec 22. 2021

애틀래틱 카니발 데이

엄마의 쪽지


‘리나엄마 잤어?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어제 리나 뭐 먹였어? ‘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지수엄마가 묻는다.


   “네? 왜요? 리나한테 무슨 일 있어요?”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애틀래틱 카니발이 있는 날이었다.

지수 엄마는 심각한 말투로 대답했다.


   ‘어 있지 있어, 오늘 학교가 발칵 뒤집혔잖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지수 엄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 리나가 글쎄 ...달리기 1등을 했지 뭐야. 그것도 3연승을!! 이게 무슨 일이야 그래 ...하하.’


지수 엄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나왔다.


   “어휴 참, 깜짝 놀랐잖아요.”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이에요? 리나가 달리기를?”


   ‘그렇다니까, 왜 그 소피아네 있지? 금발에 다리 길고 운동 잘해서 항상 스포츠는 1등 하는 쌍둥이들. 그 애들까지 제치고 3관왕으로 1등 하는데 엄마들이 다 놀래서 난리였어.  제시카 엄마는 리나 도핑테스트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니까.’


지수 엄마는 쿡쿡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뭘 먹였어 아침에? 홍삼이라도 먹인 거야? 요즘 리나 운동시켜?’


   “먹이긴 뭘요. 난 오늘도 아프다고 누워있느라 아침도 못 챙겨 먹이고 카니발 응원도 못 갔는걸요.”


   ‘자기 오늘 또 컨디션 안 좋구나. 어쩐지 안보이길래 그런가 보다 했어.  푹 쉬었다가 리나 오면 저녁에 맛난 거 많이 해 줘. 내가 1등 하는 장면 영상으로 다 녹화해 뒀으니까 보내줄게.  암튼 축하해.’


 지수 엄마는 리나 픽업도 해줄 테니 걱정 말라며 전화를 끊었다.  어안이 벙벙하다. 내 딸이 달리기 1등이라니. 시험 성적이 1등이라는 것과는 다른, 뭔가 내부로부터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숨쉬기 운동 이외에는 잘하는 운동이 없었다. 앉아서 책을 읽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고 유일한 취미였다.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체육이었고 학교 행사 중 가장 피하고 싶은 것도 운동회나 체력장이었다. 100미터 달리기 최고 기록 23초, 매달리기 0초. 테니스 시험은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의 라켓은 공을 맞추지 못하고 허공만 가로질렀다. 네트 너머로 공을 하나라도 넘겨야 성적이 나오는데  결국 0점을 받았다. 보다 못한 엄마는 테니스 수업에 등록해 주었지만, 첫 수업에서 계속되는 헛스윙의 창피함을 견디지 못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마디로 나는 몸치, 운동 부적격자였다.  


 내 딸도 나를 닮았는지 책이 장난감이고 놀이터였다. 유아기 때부터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집 안에서 책 읽고 종이를 접으며 정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리나가 오늘 달리기 1등을 했단다. 부모가 느끼는 대리만족이 이런 것인가. 나의 100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종일 누워만 있었는데  갑자기 에너지가 생기는 듯 힘이 났다.   




 아이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 한편이 아린다.  리나를 낳은 이후 나는 쭉 몸이 아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과 이상 증상들로 병원들을 전전하던 끝에 ‘섬유근통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늘 맥없이 누워있거나 반쯤 풀린 눈을 하고 있는 나는 하나뿐인 딸에게 요즘 엄마답게 열정적으로 잘해줄 수가 없었다. 단란한 분위기 속의 즐겁고 행복한 부모의 모습도 보여주지도 못했다. 아이는 철이 들어 태어난 것 마냥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놀아달라거나 혹은 무언가 사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함께 있으면 공기처럼 편한 아이가 리나였다.  아픈 나로선 손이 가지 않는 아이가 고마우면서도 ‘이렇게 빨리 철이 들 수가 있는 걸까… 내가 아픈 탓에 아이의 속도 아픈 건 아닐까…’ 늘 불안하고 가슴이 시렸다. 책을 읽고 집안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이유도 아픈 엄마에서 비롯된 성향인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호주의 학교는 생각보다 학부모가 참여해야 하는 행사들이 많이 있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어셈블리, 학부모 상담, 컨퍼런스, 한국의 운동회와 같은 애틀래틱 카니발, 수영 카니발, 책 속 캐릭터 의상을 입고 등교하는 북 퍼레이드, 성탄절 행사, 파티 등등 이외에 크고 작은 행사들이 많기도 하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로 초등학교에 간 딸애 이건만 나는 다른 호주 엄마들처럼 학교 행사에 참여해 아이의 사기를 북돋아 주거나 응원해 주지 못했다.  그날도 집 근처 올림픽 경기장에서 애틀래틱 카니발이 열린다고 했는데 나는 전신 통증이 와 참석하지 못하고 약을 먹고 이불속에 누워있었다. 아침에 스포츠 유니폼을 챙겨주고 머리를 양 갈래로 따준 뒤 얼마 전 만들어둔 노란 하우스 리본을 달아 주었다.  


   “엄마 오늘 응원 못 갈 것 같아. 우리 딸 괜찮아?”

   “응, 당연하지.”  

 

아이는 담담하게 도시락을 받아 들고 학교로 향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4년째 열리는 애틀래틱 카니발이었다.  그중 내가 몇 번이나 참석을 했던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아무리 아파도 이 번만큼은 딸아이가  양 갈래 머리를 휘날리며 멋지게 리본을 끊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어야 했는데, 그 앙증맞은 모습을 내 눈에 직접 담지 못한 게 아쉬워 입안이 바싹 타 들어갔다.   

저녁에 삼겹살이라도 구워 줄 요량으로 얼른 마트로 향했다.  삼겹살과 상추,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과 간식들로 간단하게 장을 보아 냉장고를 채워놓고 딸아이를 기다리는데 지수 엄마에게 메시지가 왔다.  보내준다던 아이의 경기 영상이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네이비 색 반바지에 흰 티를 입은 여자아이들이 트랙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작고 가느다란 윤곽들이 선명해졌다. 엄마들과 아이들의 응원소리도 점점 커졌다. 트랙의 중간쯤 달려오니 가장 선두에 뛰어오는 아이가 보였다. 양 갈래로 따아 내린 머리 끝에 노란색 하우스 리본이 달랑거렸다. 리나였다. 결승선이 다가오자 더욱 힘을 내어 뛰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슴으로 흰 리본을 끊으며 첫 번째로 들어왔다. 양쪽 볼이 발그레해져 숨을 몰아 쉬는 아이를 끌어안아 주고만 싶었다. 지수 엄마가 보내준 세 개의 영상을 나는 감격에 겨워 보고 또 보았다.  

아이가 돌아왔다.


   “우리 딸 왔어? 오늘 많이 피곤하지?”

   “ 엄마, 이거 봐.”


아이가 내민 손에 파란색 리본 세 개가 들려있었다.  리본엔 금색으로 달리기 그림과 함께 1등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 딸 멋지다.”


 나는 아이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불판에 삼겹살을 올리며 물어보았다.


   “리나, 오늘 어떻게 그렇게 잘 달렸어? 엄마가 영상 보니까 정말 빨리 달리던걸.”


   “나도 잘 몰라, 근데 그거 때문인 것 같긴 해.”


 양 볼에 한 가득 상추쌈을 우물거리며 딸아이가 말했다.


   “어? 그게 뭔데?”


   “ 도시락 속에 엄마가 넣어둔 쪽지 있잖아. 점심시간에 그거 읽고 나니 힘이 막 생겼어.”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아...그 ...’


 나는 말문이 막혔다.

카니발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도시락 속에 살며시 쪽지 하나를 넣어 두었다.




   ‘리나,  오늘 엄마가 못 가서 미안해.

관중석에 없더라도 엄마가 마음속으로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는 거 잊지 마.

다치지 말고, 경기 즐겁게 하고 와.

우리 딸 파이팅!

사랑해.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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