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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Dec 18. 2021

사는 게 바빠서


   “외할머니 가셨단다…”

 엄마는 그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싱크대에 수북하게 쌓인 설거지 거리를 닦는 손놀림이 다른 때보다 거칠고 빠르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돌아와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는 내게 엄마는 그렇게 등을 보인채 말했다. 이미 간암 말기로 복수가 가득 찬 상태인 줄 알고 있었기에 아주 놀라진 않았지만 중학생인 나는 어떤 말로 엄마를 위로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마치 할머니가 시골집으로 가셨다는 말처럼 단조로웠기에 어른이 되면 엄마가 돌아가셔도 슬프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반찬은 냉장고에 있고, 국은 베란다에 있으니까 오빠들이랑 네가 좀 챙겨서 먹어. 엄마 오늘 내려가면 며칠 못 올 거야.”

   “응... 엄마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학교 끝나면 쏘다니지 말고 곧장 집으로 와 있어.”  


 엄마는 저녁 설거지를 해 놓기가 무섭게 고속버스를 타고 외갓집으로 내려가셨다. 엄마가 안 계신 집은 적막했고 나는 외할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고등학생인 오빠들은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한 밤중이 되어야 들어올 것이었다. 고요하다 못해 삭막한 내 방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 외할머니 생각만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본 건 그로부터 한 달 전 병원에서였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할머니의 배는 만삭에 가까운 산모 같았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구나잉. 할미가 내 새끼 좋아하는 김치부침개도 부쳐주고, 게도 쪄주고 해야 하는데 이라고 누워만 있어 어쩐다냐.”

할머니는 배가 불러 말하는 것도 숨이 차 보였다.

   “교 잘 댕기고 있지? 느그 엄마 말 잘 들어라잉.”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할머니는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내 손을 꼭 쥐었다.  


 여름방학마다 외가에 내려가면 할머니의 마디가 굵은 손가락은 더욱 바빠지곤 했다. 갯벌에서 팔각정으로 이어진 수로를 타고 기어 다니는 방게들을 잡아 간장에 조리고, 바위틈에 실처럼 돋아난 세미를 바늘로 파내다가 기름에 바삭하게 볶아주셨다. 특히 세미는 시장에 파는 해초가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별미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가장 그린운 할머니의 음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엄마가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 타지에서 사업을 한다던 외할아버지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양산을 손에 든 여자와 함께 돌아오셨다고 한다. 아들을 낳아줄 귀한 여자라며 할아버지는 조강지처와 딸들을 모두 처가로 쫓아버렸다. 엄마의 외할머니는 내 딸 고생시키는 놈의 자식들이라며 자신 집에 와있는 외손주들을 대놓고 구박하고 미워했다. 외할머니는 친정부모님께 면목이 없어 자식들 역성조차 들지 못했다.  엄마는 구박데기 신세보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외할머니를 보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성년이 되자마자 엄마는 이모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결혼할 때까지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딸들이 자식들을 거느린 엄마가 되었는데도 어린 시절 제대로 챙겨주고 보살펴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셨던 것 같다. 일 년에 한 번 딸네 가족들이 오면 바다로 들로 시장으로 돌아다니며 먹거리를 구해다 진수성찬을 차려 주셨고 하나라도 더 먹이지 못해 아쉬워하셨다. 어떤 날은 출발하려는 고속버스 창문으로 외할머니가 급히 파란 비닐봉지를 밀어 넣었다. 그 안에는 삶은 달걀 한 줄과 아이스크림이 들어있었다. 외할머니는 떠나는 차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드셨고 엄마는 무릎 위에 놓인 비닐 봉지만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엄마는 이모들 전화를 받고 외가로 내려간 지 삼일 째 되는 날 전화를 했다. 초상집이면 곡소리가 날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음은 잔칫집 마냥 소란했다.  엄마는 밝은 목소리로 나와 오빠들이 잘 지냈는지 냉장고에 음식들은 잘 챙겨 먹고 있는지 물었다.  좀처럼 들을 수 없는 하이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나오는 듯도 했다.  

 ‘어른들은 엄마가 돌아가셔도 슬프지 않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몰랐다면, 나는 엄마가 이모들이랑 야유회쯤 간 것으로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셨다.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나를 보며 평소보다 더 많이 웃었고 자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새벽녘에 깨어 물을 마시러 주방에 내려갔다.  고무장갑을 낀 채로 바닥에 주저앉은 엄마는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엄마’를 부르며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곁으로 다가가 위로할 엄두가 나지 않아 조용히 방으로 올라왔다. 난생처음 보는 엄마의 눈물이었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왜 대답이 없어?’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오빠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어?’

   ‘그러니까 부영 상조하고 하나 상조하고 둘 중에 어디가 낫겠냐고.’

   ‘아… 미안. 어디까지 얘기했지?’

   ‘에이 진짜… 실컷 설명했더니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오빠 지금 바쁘니까 그럼 네가 웹사이트 들어가서 둘 다 견적 뽑아서 봐. 그리고 니 새언니한테 전화해서 어쩌는 게 낫겠는지 상의해. 지금부터 부어 놔야 큰일 치를 때 부담이 좀 덜하지.’

   ‘어… 알겠어. 오빠 어서 일해. 내가 찾아보고 언니한테 전화할게.’

 

 오랜만에 전화를 한 오빠는 갑자기 상조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연세도 있으시고 하니 지금이라도 형제끼리 상조에 가입하자는 거였다. 엄마의 장례 준비라니… 생각만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갑자기  외할머니 돌아가신 때가 떠올라 오빠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나 자신이 이미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음에도 나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아이 같은 마음으로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상조나 실버타운을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금이라도 회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모든 걸 품고 다 이해해 주는 우리 엄마이지만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헤아리는 딸이고 싶다.  



 

외할머니 기일에 제사를 마치고 엄마와 이모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집에 가는 길이 멀었을까?  나 사는 데만 바빠서 울 엄니 자주 보러 오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이다 난.  임종 앞두고 그리 고생하실 때라도 달려와 장녀답게 곁을 지켜드릴 걸… 뭐가 그렇게 중해서 못 와봤을까... 후회해 봤자 다 늦었지… 울 엄니 생각하면 그 후회밖에 안 남...”  

   “큰언니, 그러지 마. 엄마 다 이해하셔. 애들 셋에 치매 걸린 시어머니 놔두고 어디 오기가 쉬워. 형부는 맨날 바쁘다고 한 밤중에 들어오고. 옆 동네도 아니고 서울에서 격포가 어디라고 자주 와. 자책하지마..." 


 큰일이다.  

나는 엄마 곁을 떠나 시드니에 온 지 17년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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