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하늘이 손톱 끝 봉숭아 꽃물처럼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9살의 나는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걷고 있었다. 피아노 선생님 품에 안긴 아나시아가 학원 베란다에서 손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도 예쁜 아나시아는 이제 두 살 배기였다. 늘 동생을 원했던 나는 오동통한 볼을 움직이며 ‘어니 어니’라고 부르는 귀여운 아나시아를 볼 수 있어 피아노 학원을 좋아했다. 선생님은 수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마다 아나시아를 안고 내가 골목을 벗어날 때까지 발코니에 나와 계셨다. 노을을 배경으로 선 어여쁜 아나시아와 선생님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고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으악!!’
‘첨벙’
나는 순식간에 어딘가 빠지고 말았다. 하수구 위에 놓인 콘크리트 블록 하나가 어쩐 일인지 열려 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커먼 시궁창 물이 무릎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낑낑거리며 하수구 위로 기어 올라왔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지만 두 다리가 새까맣게 변했고 시궁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놀라고 창피한 마음에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큰소리로 울지 않으려 이를 앙다물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어 어둠이 깔려왔다. 이날만큼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다행스러웠다.
정신없이 울며 걷다 보니 어느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 있었다. 숨이 넘어갈 듯 꺽꺽 거리는 소리만 나올 뿐 엄마를 부를 기운조차 없었다. 집은 조용했다.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현관 쪽으로 나오셨다. 할머니는 몇 해 전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나는 할머니를 보자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에 아들도, 손주도 알아보지 못하던 할머니였건만 두 다리가 시꺼멓게 시궁창 물에 빠져 울고 있는 나를 보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워메 아가 어쩌다 그랬냐잉?’
할머니는 달려 나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손을 잡고 욕실로 데리고 가 대야에 물을 받아 아이보리 비누를 두 손바닥으로 싹싹 비벼 다리를 씻고 헹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아이고, 내 새끼 큰일 날 뻔했네잉, 울지 마라 울지 마 할미가 깨깟허게 해줄게잉.’
어느새 울음이 잦아들었다. 간간히 코를 훌쩍이고 설움의 흔적으로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이 크게 쉬어지긴 했지만 할머니가 나를 ‘아가’라고, ‘내 새끼’라고 부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긴치마를 오므려 쪼그리고 앉아 다리를 씻기는 할머니의 어깨를 짚고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돌아온 것이다.
할머니가 나를 알아본 것은 유치원 때가 마지막이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할머니는 그토록 이뻐하던 나를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며 밀어내곤 했다. 예뻐하기는 커녕 내 과자봉지를 빼앗거나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할머니가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내게 팔베개, 무릎베개를 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할머니가 그리웠다.
“할머니?”
“오야, 내 새끼 놀랬지~ 할미가 걸을 때 바닥도 봄서 다니라고 혔지? 조심해야 혀 ~”
장에 갔던 엄마가 돌아왔다. 아이보리 비누로 시궁창 냄새를 빼기에 역부족이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코를 잡았다. 엄마는 할머니를 나오시게 하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조심성이 없다며 잔뜩 혼이 나면서 뽀얗게 목욕을 마치고 나온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할머니 방으로 달려갔다. 할머니 팔을 베고 누워 옛날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할 터였다.
방문을 열자 티브이를 보고 있던 할머니가 뒤를 돌아본다. 멍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할머니는 다시 떠나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