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별 Dec 19. 2021

옐로우 미모사 향

    “엄마, 이거 한국 냄새나.”


옷장을 정리하는데 딸아이가 두꺼운 겨울 티셔츠 하나에 코를 묻고 말한다.


    “오잉? 한국 냄새가 뭔데?”

    “외할머니 집에 가면 항상 이 냄새가 나. 할머니한테도 나고...엄마도 맡아봐"


아이는 내 코에 셔츠를 바짝 대어준다.


    “아...”


거기선 정말 희미하게 엄마 냄새가 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맡던 그 냄새.


    “이거 그거다."

    “뭔 데? 뭔 데?”

    “할머니는 빨래할 때 꼭 옐로 미모사 향 섬유유연제만 쓰시거든.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 셔. 엄마가 어릴 때부터…”


    “이 티셔츠 지난겨울에 네가 한국에서 입었던 거지? 그때 할머니가 빨아 두셔서 그 향이 아직 남아있는 걸 거야.”


    “우와, 난 할머니 냄새 좋아. 엄마, 우리도 그 유연제 쓰면 안 돼?”


 아이는 그 냄새가 꽃향기라도 되는 양 코에 자꾸 셔츠를 가져다 대고 맡는다. 출산 이후 계속 몸이 아파 딸아이는 유치원에 갈 때까지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생후 5년간 호주와 한국을 오가며 할머니 품에서 컸기에 그 품 안에서 맡던 향기가 아이에게 한국 냄새, 할머니 냄새로 각인이 된 것이다.




 출산이 임박해오자 나는 엄마에게 SOS를 보냈다. 산후조리원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호주 땅에서 홀로 아기를 돌보고 몸조리를 할 자신이 없었다. 혼자서는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는 엄마라 시드니까지 헤매지 않고 잘 오실 수 있을지 근심하며 공항으로 향했다. 입국장 게이트 문이 열리자 씩씩하게 걸어 들어오는 반가운 엄마 모습. 지금도 그날의 장면이 눈에 선 하다.  60대의 엄마는 참 젊었다. 적당한 체격에 자연스럽게 염색한 갈색 파마머리, 곧 돌아갈 것이라는 의지를 보이듯 단출한 기내용 캐리어 하나를 가볍게 끌며 빠른 걸음으로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한 달 정도 예상하고 막내딸의 산후조리를 해주러 시드니에 오신 엄마. 그때는 나도 엄마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출국장을 나서는 날엔 얼마나 달라진 모습으로 걸어 나가게 될지…


     “딸! 엄마가 걱정하지 말랬잖아. 사람들 나오는 대로 쭉 따라오니까 금방이던데 뭘.”

 

엄마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그까짓 꺼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눈물이 그렁한 만삭의 딸을 토닥이며 안아주었다. 엄마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그 행복감과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줄줄이 읊어대며 엄마에게 응석을 부렸다. 임신기간 내내 닭칼국수만 먹던 나는 막달에 엄마가 만들어주시는 음식들을 실컷 먹고 최종 몸무게 20 킬로그램 증가를 이뤄냈다. ‘아이 낳으면 빠지겠지 뭐.’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낳아보니 아이는 2.7킬로밖에 안되고 양수까지 빠져도 몸무게는 15킬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살은 쪘지만 출산 전 마지막 2주 엄마와 함께한 시간은 앞으로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는 행복한 만찬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힘들었던 출산의 기억을 모두 되짚고 싶지는 않다. 자신 있게 병원으로 걸어 들어가 긴 지옥을 맛보았고 삼 일 후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아이를 안고 돌아왔다. 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출산 이후 점점 쇠약해지던 나는 1년 후 난치성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늘 통증에 시달리고 방금 출산한 산모처럼 지쳐 있는 딸을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한 엄마는 손녀딸이 취학연령이 될 때까지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주셨다. 5년 뒤 여전히 아픈 딸과 어린 손녀딸을 뒤로하고 시드니 공항을 빠져나가는 엄마의 모습은 처음 오시던 날과 대조되어 더욱 잊히지가 않는다. 젊고 쌩쌩했던 엄마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백발의 머리에 한층 작아지고 쪼그라든 어깨로 차마 뒤돌아보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마지막 남은 젊음을 아픈 딸과 손녀에게 모두 털어주고 가시는 그 뒷모습에 내 안의 무언인가 쩍 하며 갈라졌다.


내가 미안해할 때마다 엄마는 이야기하신다.


     “그런 소리 마라, 우리 손녀가 할미한테 얼마나 큰 기쁨을 줬는데 그런 소리를 해.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살 필요 없었는데… 엄마는 너희 셋 키우면서도 사는 게 힘들어 아무 즐거움을 몰랐어. 너희들 자라는 모습, 재롱부리는 모습 하나 제대로 본 기억이 없으니까... 우리 딸이 아파서 엄마도 가슴은 아팠지만 첫 아이 키우듯 엄마 인생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



 가족 중 한 사람이 오랫동안 아프면 모두가 힘겨운 날들을 보내게 된다. 엄마가 후회하듯 나도 아이가 자라나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온전히 감상하지 못했고 집안에는 수많은 갈등이 생겨났다. 신을 원망하며 광야에 홀로 서있었다. 고통의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아 두려워하면서...


 다행히도 시간은 묵묵히 흘렀다. 그것이 참 고마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장도, 깨달음도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고통의 시간 속에도 빛나는 순간들은 존재했고 삶은 계속되었다. 아이는 대견하게도 몸과 정신을 채우며 눈부시게 자라 이제 열두 살의 소녀이다. 나는 여전히 아프지만 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시련이 나를 키운다는 것을 배웠고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  고통스럽고 정체된 불행의 시기는 엄마와 울고 웃으며 함께 살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라 여기게 되었다. 고생시켜 죄스럽기만 한 마음을 버리니 엄마에겐 외할머니의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 아이만이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랑을 받는 시간이었음도 깨달았다.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들었을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민들레 홀씨를 보면 할머니 손잡고 아장아장 걸으며 볼을 힘껏 부풀려 불어보던 그 봄이 생각날 것이다. 옐로 미모사 향을 맡을 때마다 할머니의 포근한 품이 떠오를 것이다.


 내가 인식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차이일 뿐 불행의 뒷면에는 축복이, 인생이 주는 선물이 숨어있다.

 


이전 02화 ㅎ받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