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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Dec 21. 2021

ㅎ받침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춤추듯 교정에 융단을 깐다.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무덤을 발로 차고 한아름 들어 흩뿌리기도 하며 재잘거린다.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나무들. 가지마다 매달린 가을꽃들이 하롱하롱 건네는 마지막 인사에 그만 정신이 팔린다.

 

나는 한글학교 교사다. 쉬는 시간. 아이들이 안전하게 노는지 지켜봐야 하건만 가을이 그려내는 풍경에 잠시 본분을 망각했다. 갑자기 달려와 내 허리춤에 얼굴을 묻고 꼭 안아주는 아이 덕에 정신을 차린다. 내 얼굴 한번 올려다보고 빙긋 웃는 녀석. 그리곤 조르르 동무들에게로 뛰어간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일주일 중 가장 기다려지고 한편으로 긴장되는 날, 한글학교에 아이들을 만나러 오는 토요일이다.


    “리나 어머니, 다음 텀부터 한글한교 수업 맡아보시는 거 어떠세요?”


 3년 전 딸아이가 다니던 한글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교사로 일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아픈 몸으로 십 년째 집에만 있던 터라 고민이 되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분명히 몸이 더 안 좋아질 거야... 하루 일하고 며칠을 드러누울 걸 알면서 시작하는 건 어리석은 거 알지? 얼마 못하고 그만두면 한글학교에도 민폐라고.’


 건강한 사람들에겐 일주일에 하루 단 몇 시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별일 아닐지 몰라도 나의 몸은 일상의 사소한 활동에도 쉬이 지치고 무너졌다. 언제나처럼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불가능한 일이라며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도전해 보고 싶었다. 아무런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숨만 쉬며 흘려보낸 나의 30대가 사무치도록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결정을 못하던 나는 그 무렵 아이 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했다. 몸도 마음도 요양이 필요했다. 친정 엄마를 모시고 제주도에 내려가 한달살이를 해보기로 했다. 고민과 걱정 따위는 잊어버리고 마냥 게으르게 보낼 심산이었다. 제주 공항 근처 해안도로 가에 있는 아파트를 숙소로 잡았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침대 곁에 쌓아둔 채 종일 뒹굴거리며 뒤적이다 그도 무료해지면 베란다에 앉아 제주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비행기는 처음이었다. 소리에 민감한 나는 그 엄청난 소음에 여기서 어떻게 한 달을 보내려나 했는데 어느새 그 소리도 별게 아닌 것처럼 익숙해졌다. 밤바다 위로 뜨고 내리는 비행기는 더욱 특별했다. 아스라한 별처럼 보이던 빛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한 밤의 커다란 보름달보다 밝은 빛을 내며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빛이 검은 바다 위에 비쳐 찰나이지만 하늘도 바다도 빛나는 보석을 품는다. 따끈한 생강차 한 잔 손에 쥐고 겨우내 바다를 바라보다 시드니로 돌아왔다.


 바다 때문인지 비행기 불빛 때문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돌아올 때는 더 이상 고민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한글학교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교장선생님께도 결심을 알린 상태였다. 길게 고민하고 생각할 때는 결정이 나지 않던 일이 내려놓고 있으니 오히려 쉽게 매듭지어졌다. 낯선 문을 열기 전에는 누구나 손잡이를 붙잡고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것은 찰라이다. 이왕 시작하기로 한 한글학교 교사일을 나는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대학도 대학원도 국문학이나 한국어 교육 관련 전공이 아니었고 이민생활 십여 년 차라 한국어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곧장 해외에서도 온라인으로 수강이 가능한 학국어학과에 입학했다.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고 긴 시간 책상에 앉아있으면 어김없이 동반되는 전신 통증, 스무 명 안팎의 아이들에게 목청껏 한글을 가르치고 돌아오면 다음날까지 쓰러져 있어도 풀리지 않는 피로감. 역시 섬유근육통 환자에겐 예상대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하지만 생각 지 못한 것이 있었다. 마음을 가득 채워주는 충만함. 지난 십 년간 잊고 살았던 감정이다. 나는 읽고 듣고 배우고 나누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국 땅에서 살아가지만 한국의 뿌리를 가진 아이들과 우리의 글, 문화와 역사를 함께 공부하는 일은 생각한 것 이상의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제는 한 명 한 명 예쁘고 순수한 아이들에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큰 것을 안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그 충만함이 몸과 마음의 회복력을 키워주고 있다는 것도.


     “선생님, 이거요.”


 쉬는 시간에 한 녀석이 직접 만든 카드를 내밀고는 후다닥 가버린다.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 넣은 카드를 열어보니 삐뚤빼뚤 쓰여 있는 한 마디.

 

    ‘선생님, 너무 조아요.’

 

미소 지으며 작은 카드를 주머니에 넣는다.


    ‘그래 우리 아직 ‘ㅎ’ 받침은 안 배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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