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홉 Dec 14. 2023

수영과 타투의 공통점

퇴근 후 매일 동네 수영장에 가고 있다. 이곳에서는 현실 같지 않은 감각을 누릴 수 있다. 사실 유치원 때 이후로 쫄쫄이 수영복에 손을 대지 않았던 나로서는 '수영장'에 가는 것이 부담과 공포로 느껴졌다. 심지어는 성인이 된 후 워터파크나 바다에 가는 것도 수영복 때문에 꺼리기도 했었고 가기 전부터 근육이 긴장되고 두려운 감정이 몰려왔다.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 몸을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것은 내가 가진 공포였고 억압이었다. 

 

그랬던 내가 생명의 위험을 몇 번 겪고 나서 물 공포증을 이겨내겠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수영 강습을 등록했다.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이걸 입는다고?'하는 의문이 들었던 게 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조금의 노출도 튀는 복장이 되어 은밀한 시선을 받게 되는 데(특히 지하철에서) 모두가 허용하는 합법적인 노출 옷을 입고 운동을 하는 스포츠라니 묘하고 신기한 감정이 들었다. 

 

본격적인 수영을 하기 위해 누구나 관문처럼 통과해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샤워실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서 대중목욕탕에 가지 않은 지 꽤 오래였던 나는 약간 긴장되었다. 예상과 달리 마음이 편했다. 다양한 여성과 몸이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었고, 어떤 불편한 시선 없이 편하게 씻을 수 있었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수영을 배워야겠다는 다짐과 수영장에 실제로 오기까지의 시간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어이없을 정도였다. 마른, 근육이 있는, 살집이 있는, 세월이 보이는 다양한 여성의 몸이 보였고 그게 좋았다. 귀엽고 알록달록한 수영복을 입는 순간, 그들은 그저 수영인이 되었다.

 

수영장의 세계는 바깥과 분명 달랐다. 타투를 한 젊은 여성들이 꽤 자주 보였다. 

사실은 몸이나 거기에 새겨진 흔적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영하는 동안엔 '어떤 자세로 멋지게 수영하는가'에 대한 관심만 집중되었다. 허벅지에 제법 큰 타투가 있는 여성이 첫 번째로 평영을 하며 유유히 레인을 돌았다. 그를 향한 말과 시선은 '너무 잘하신다.' '평영 천재다.' 같은 초보들의 부러움 섞인 순수한 감탄뿐이었다. 여성분이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자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기엔 나이 든 아저씨와 할머니, 그리고 나도 있었다. 하나같이 평영을 할 때 다리는 어떤 모양으로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배움을 갈구하는 사람들이었다. 

 

현실 세계(특히 길거리와 전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수영복 같은 노출된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 어떤 시선을 받는지 익히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수영장의 풍경이 꽤 낯설고 자유롭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는 그랬다. 

 

타투가 있는 수영인을 보며 수영과 타투의 공통점을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타인에게 몸을 공개해야 하지만, 그런 부담은 잊어버리고 몸의 긴장을 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매번 수영 영법을 배울 때마다 강사님들이 '힘 빼세요'라는 조언을 하곤 했는데, 나한텐 정말 어려운 숙제였다. 힘을 준 적이 없는데 빼라고요. 하는 당혹감. 

 

신기한 점은 정말로 두려움을 없애고 물에 몸을 맡기면 새로운 감각이 떠오르고 서서히 나아가는 걸 느낄 수 있다. 타투도 그러했는데, 처음 팔 안쪽에 나무를 새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과연 이 과정이 편안할지 궁금했다.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타인에게 몸을 드러내고 완벽하게 누운 자세로 모든 걸 맡겨야 하는 시간이었다. 잠깐의 어색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금세 자연스러워졌다. 누운 채로 팔 한쪽을 걷어 자연의 형상물을 새기고, 모르는 누군가와 약간의 농담을 주고받으며 편안함을 느꼈다. 

 

이상하게 나는 가장 두려웠던 부분이 사실은 괜찮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온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수영장에서 그랬고, 작년에는 타투샵에서 그랬다. 재작년에는 집 앞 마트에서 그랬다. 맨 얼굴의 두려움으로 입술에 색을 입히는 (지긋지긋한) 행위를 그만둔 채 처음으로 완전한 민낯으로 외출했고 그게 차츰 쌓여 벌써 약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화장(혹은 꾸밈)에 대한 강박을 전혀 느끼지 않고 편안한 본연의 모습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완벽한 보임'에 대한 강박의 세계는 분명 있다. 저마다의 정도는 다르지만, 일종의 억압을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몸도 있다. 분명한 건 다른 법칙과 규율을 적용해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곳도 존재한다. (만약 그런 곳을 찾지 못한다면 나와 비슷한 이들과 모임을 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진 몸을 조금 더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기를. 더 많은 편안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갈증과 오래된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