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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당근 Oct 24. 2021

베네수엘라에 간 이유

로라이마 산


 남미 배낭여행을 떠나는 꽤나 강단이 있는 사람도 두 손 들며 돌아가는 구간이 있다. 바로 악명 높은 베네수엘라이다. 남미는 어디나 치안이 좋지 않아 늘 조심하고 긴장을 놓칠 수 없지만 그중 베네수엘라는 각별히 신변 보호를 위해 만전을 기해야 한다.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고, (전쟁을 하는 나라들을 제외하면) 살인율 역시 가장 높다는 오명을 가진다. 베네수엘라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권총 강도, 납치, 살인 등 무시무시한 사건에 대한 글을 쉽게 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피해자에 나를 대입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했다. 게다가 경찰 역시 부패한 탓에 믿을 수 없다는 게 여행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공권력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각자도생, 베네수엘라에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여행을 했을 2013 당시에는 차베스 대통령이 죽은   달도  안되어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외교부가 베네수엘라를 여행 자제 지역으로 선정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이 베네수엘라에 입국했다는 정보가 뜨면 외교부에 팩스가 바로 간다고 했다. 베네수엘라를 벗어난 한참 , 에콰도르에 체류하고 있을  다른 여행자로부터 베네수엘라가 폭동으로 휴지와 같은 생필품조차 부족해 콜롬비아에서 겨우 구한다는 말을 들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기억이 난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여행을 시작했더라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남미 여행 카페에는 나라별로 정보를 편리하게 찾을 수 있도록 게시판이 나뉘어 있다. 다른 나라들은 2013년에 작성한 글을 보려면 적게는 50페이지 많게는 100페이지 가까이 뒤로 넘어가야 하지만 베네수엘라는 단 5페이지 넘겨도 당시 내가 쓴 글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위험한 곳을 겁 없이 무모하게 돌진했던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신의 탁자라고 불리는 로라이마 산을 등반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당시에는 앞서 나열한 무시무시한 위험요소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현실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간에 강한 의지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달려가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할 뿐이었다.






 로라이마 산은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가이아나 3개국의 국경에 걸친 기아나 고지에 위치한 테푸이(Tepui) 중 가장 높은 해발 2,810m의 산이다. 우리나라의 백두산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국의 식물학자 임 투른이 로라이마를 조사하고 귀국 후 촬영한 사진을 이용하여 강연회를 열었는데 청중에 있던 작가가 그 풍경에 감격하여 소설의 배경으로 착안하였다. 소설의 제목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추리작가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이다. 또한 픽사 애니메이션 <업>의 배경이 되기도 했는데 로라이마 산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니 더욱 판타지 속 미지의 세계 같았다.


 로라이마 산을 신의 탁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심플하다. 산 모양이 직사각형으로 정상이 넓고 평평한 땅으로 되어있다. 엄청난 크기의 탁자 모양 산을 처음 보았을 때 충격을 잊지 못한다. '세상에 이런 산이 있다고?' 사진임에도 그 영험한 기운이 스산히 느껴졌다. 무대 효과처럼 산의 허리쯤에 걸쳐진 하얀 구름들이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로라이마 산 주변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테푸이 수백 개가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순간적으로 뜨거운 불길이 탁! 하고 지펴졌다. 로라이마 산 정상 위에 있는 내 모습을 그려보니 너무나도 멋질 것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순히 산을 올라가는 것에 그쳤더라면 이토록 도전 의지가 불타지 않았을 거다. 이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오로지 5박 6일 트래킹 코스로 이동해야 한다는 글을 읽고는 더욱 내 마음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이거다!’하며 두 눈이 번쩍 떴다.


 배낭여행을 통해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나의 육체적 한계를 확인할 기회가 생긴 거라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눈 오는 날 한라산을 등반했던 경험을 통해 내가 꽤 고생스러운 일을 잘 참고 버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그때는 생각지도 못하게 눈이 내리게 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오른 거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터라 배낭여행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힘든 나날들도 굳세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그리고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로 모험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신비로운 로라이마 산이 아주 적격이었다.




차베스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폭동의  시작점인 2013 5, 베네수엘라에 처음 발을 들였다.


 브라질 상루이스에서 비행기로 아마존이 있는 마나우스를 거쳐 국경 가장 가까운 도시 보아비스타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뜬눈으로 날을 새고 아침 일찍 버스로 국경 마을 파카라이마로 향했다. 특이하게도 브라질에서 베네수엘라로 넘어가는  오로지 택시만 가능하다. 


 상루이스를 출발할 때부터 비가 쏟아졌다가 그치기를 반복하여 하늘은 우중충했다. 좁은 도로를 열심히 달리던 택시가 멈춰 섰을   출입국 관리사무소는 ‘설마 여기?’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주 아담하고 허술.  창을  문지기들이 철벽 방어를 하는 모습을 기대한  아니었으나 적어도 자신의 영토에 넘어  낯선 이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있을 거라 예상했던 지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직원  사람이 책상 하나를 두고 앉아 있었다(  정도의 크기이다). 이런 터라 위압감을 껴지지 않아 마음이 놓였지만 기사님의 실수로 잘못 내려준  아닐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어 살짝 불안해졌다.


 직원은 어떠한 경계심도 없이 쓰윽 바라봤다. 그렇다고 딱히 환영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녀는 나에게 “직업이 뭔가요?”, “여기는  왔나요?”라고   가지 질문만 했다.  역시 간단하게 “학생입니다”, “배낭여행하러 왔어요.”라고 답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입국 도장을 쾅하고 찍어주었다. 난생처음 육로로 국경을 넘는 터라 잔뜩 긴장했던  무색해졌다.


 택시는 로라이마 트레킹의 출발지인 산타엘레나에서 멈춰 섰다. 카페에서 찾아본 정보로는 포사다 미쉘과 백패커스라는  호스텔에서 로라이마 투어를 신청할  있다.  호스텔의 싱글룸 가격은 으나 투어비는 백패커스가 조금  비싼 터라 기사님께 포사다 미쉘로 가달라고 말씀드렸다.


 기사님은 처음 듣는 이름인지 갸우뚱하시더니 길을 가던 사람을 불러 세워 길을 물어보셨다. 행인의 설명을 듣고는 금방 숙소 앞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택시를  때는 '혹시 나쁜 사람이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좌불안석이었으나 이렇게 안전히 목적지까지 내려준 기사님이 웃으며 인사해주시자 방금 까지 의심한 게 죄송했다. 그래서 더욱 밝게 "감사합니다! (Gracias)"하고 인사했다.


 포사다 미쉘에  짐을 내려놓고 환전을 하기 위해 호스텔 직원이 알려준 거래 장소로 향했다. 베네수엘라는 반드시 암거래로 환전을 해야 하는데  이유는 공식 환전소를 이용하면 10 가까이 어마 무시하게 환율이 차이가  엄청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암 환전상과 거래를 해야 한다는   찜찜했다. 상상  암환전상은 아주 음침한 표정에 어두운  세계의  세력과 결탁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갔다.


 호스텔 직원이 알려준 거리로 들어서자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누가 봐도 여행자인 나에게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비스 마인드를 장착하고 활짝 웃으며 “아리가또~깜비오(cambio, 환전)?”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남미에서는 동양인만 보면 일본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에는 암환전상이 발 디딜 틈 없이  깔려 있어 나를 둘러싼 그들의 경쟁률이 매우 치열했다. 이렇게 뜨거운 구애는 받은 적은 없는데. 무작정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하는 무례한 사람도 어 그럴수록 더욱 깐깐한 표정을 지으며 무시하고  안쪽으로 당당하게 파고들어 갔다.


 처음에 거래를 시도했던 환전상이 1달러에 20볼리비아르를 불러 이를 기준으로 여러 환전상을 거치며 네고한 덕에 최종적으로 23.5 볼리비아르로 환전을 하게 되었다. 내가 거래를 한 환전상은 나이가 40-50대로 보이며 진중한 인상에 짙은 콧수염을 가졌다. 그는 방금까지 지나쳤던 다른 환전상들처럼 가벼워 보이지 않아 신뢰가 갔다. 그리고 수습생으로 보이는 내 또래의 남자가 옆에 찰싹 붙어있어 신뢰도가 더 상승했다. 수습생이 있을 정도라면 프로라는 의미이니까. 물론 좋은 쪽으로 프로는 아니지만.


 그는 바로 옆에 있는 가게로 불러들였고 그것도 모자라 깜깜한 커튼이 쳐 있는 곳에서 조심스럽게 거래를 했다 항상 대충대충 하는 나이지만 돈을  때만큼은 아주 야무지고 꼼꼼했다. 왠지 영화   장면에 있는 것처럼 스릴 . 지폐가 엄청나게 두꺼워져 큰돈이 수중에 있다는   각하게 되어 살짝 긴장이 되었다. 환전상이 안전하게 돈을 분산해서 보관하라고 해서 이곳저곳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황급히 빠른 발걸음으로 숙소를 향했다. 여전히 환전상들이 웃는 얼굴로 '아리가또'라며 다가왔고, 겨우 뿌리 치면서 걷고  걸었다.    





 로라이마 트래킹은 멤버가 모두 모이면 가이드 한 명, 짐을 옮기는 포터 두 사람이 붙어 함께 움직인다. 팀에 있는 사람 수만큼 비용을 나누게 되니 가능한 사람들을 많이 모이는 게 좋다. 포사다 미쉘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함께 트레킹을 할 동료들이 손을 흔들며 밝게 맞이해주는 그림을 상상했다. 하지만 숙소는 오랫동안 손님이 방문하지 않은 곳처럼 어두컴컴하고 조용했다.

 

 이대로 며칠 동안 발이 묶여 다른 여행자들을 기다리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가게 되면 어쩌나 걱정됐다. 환전을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희망을 놓지 않으며 그 사이에 단 한 명이라도 와있길 기대했으나 여전히 숙소는 고요했다. 오히려 한층 더 어두워진 느낌이다. 그때 포사다 미쉘의 주인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알아보니 백패커스에 사람이 두 명 있다고 하네요. 거기로 가보는 건 어때요?”


 그의 말은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동시에 ‘보통은 손님을 붙잡아 두기 위해 이런 정보를 안 알려주지 않나?’하는 생각에 의아했다. 이렇게 순순히 나를 보내주는 건 어쩌면 인사를 하고선 다짜고짜 로라이마 트레킹을 신청한 사람이 몇 명인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어보았던 것 때문이 아닐까. 주인장의 눈에 아주 간절해 보였을 테다. 아니면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그의 대답에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도 모른다.


 아직 완전히 짐을 푼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떠나도 되는지 신경이 쓰였으나 내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의 목적은 로라이마에 오르는 것이기에 로비에 있는 가방을 냉큼 들쳐 맸다. 고개를 연신 숙이며 “Gracias! Gracias”인사하며 백패커스로 향했다.


 백패커스는 포사다 미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드디어 방에 짐을 풀고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이곳도 쥐 죽은 듯 조용해 포사다 미쉘과 다를 바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아마 두 명의 여행자가 잠깐 외출을 했을 거라 생각하며 백패커스에 딸려있는 레스토랑에 내려와 샌드위치와 주스를 주문했다. 확실히 브라질보다는 물가가 쌌다.


 음식을 거의 다 먹고 수첩에 방금 먹은 음식 값을 적고 있는데(여행 초기에는 꼼꼼하게 가계부를 작성했다) 누군가가 맞은편에 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한 남자가 제 자리인 듯 아주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의 테이블에 앉는 경우가 없으니(그것도 어떤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아주 당황스러웠다. 이때만 해도 여행 초기라 나는 낯선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여행에서 새로운 누군가를 알아가는 속도는 일상과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갑작스럽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두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작 당사자는 고개를 돌려 여유롭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짙은 갈색 단발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잘생긴 남자였다. 묘하게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아라곤을 연상시켰다. 침묵이 길어지자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할 말을 열심히 생각해내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향해 고개를 훽 돌리더니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 넌 어디서 왔니?”

“안녕..? 난 한국에서 왔어.”

“난 영국에서 왔어. 알레한드로 야.”

“난 지현.”


 그는 거침없이 불쑥 다가오는 적극적인 면모에 비해 무표정에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다지 외향적이거나 활달하지 않아 보였다. 서로 간단한 소개를 마치자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가 한참을 이어지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렀다.


“안녕! 난 클라우디오야. 여기서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너밖에 못 봤어!”

그 역시 옆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안녕 난 지현. 반가워. ”

“얼마나 여행을 하는 거야?”

“난 4개월 정도 남미를 여행할 생각이야.”

“정말 용감하네!”


 클라우디오는 쾌활한 표정으로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남미 사람들은 엄지를 올리는 제스처를 많이 사용한다. 알고 보니 클라우디오는 베네수엘라 사람이고 알레한드로는 칠레 사람이었다. 이들은 런던에 살고 있는데 여행 차 남미를 잠깐 들렀다고 했다. 붙임성 좋고 친절한 두 사람과 5박 6일의 여정을 함께 하는 건 꽤 즐거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내일 간단한 투어만 하고 이곳을 떠난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로라이마를 건너뛰다니!’라는 생각에 놀랐지만 이들은 큰 결심을 하고 남미에 와야 하는 나와 입장이 다르다.


 다음날 아침 포사다 미쉘 옆에 붙어있는 작은 가게에서 아침식사 대용으로 요거트를 사는데 또다시 어디선가 알레한드로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나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는 오늘 투어를 할 건데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합류하겠다고 했다. 여전히 로라이마 트레킹 멤버가 한 명도 오지 않은 상황에서 숙소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 바에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  


 알레한드로가 알려준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가니 40대 중반 정도의 여자 투어가이드와 새로운 여행자 한 명이 보였다. 그는 자신을 Alone이라는 닉네임으로 소개했다. 그는 작은 체구에 비해 큰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닉네임처럼 홀연히 사라져서 내가 찍은 사진의 10배는 멋진 사진을 찍어 돌아온다. 알롱은 말레이시아인이지만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 남미에 있으니 외적으로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아시아인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 역시 나처럼 로라이마 트레킹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던 중이었다고 하자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투어는 간단하다. 차를 타고 브라질로 넘어가 테푸이를 멀리서 쭉 둘러보는 거다. 물론 중간에 계곡이나 폭포를 구경하기도 하지만 메인은 역시 테푸이다. 국경을 넘기 때문에 여권 확인과 간단한 짐 검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검문을 한다고 하니 괜히 긴장되어 의심을 살 물건은 없는지 가방 속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예상대로 국경 경찰이 차를 세웠으나 다행히 여권이나 짐을 검사하는 절차 없이 가이드가 제시한 신분증만 확인하고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


 도로는 다른 차들이 없어 앞이 뻥 뚫려있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매끄럽게 내달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가득 차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이미 먼 길을 떠나왔는데 더욱 먼 길을 떠나는 기분이다. 한창 달리는 도중 주위가 조금 어두워졌다 싶어 바깥을 내다보니 새파랗던 하늘은 온대 간데없고 우중충한 어두운 구름이 우리 머리 위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란 사바나 지역은 열대우림 기후라 날씨가 변덕스럽고 비가 자주 내린다.


 쌩쌩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도로 중간에서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내리길래 '무슨 문제가 있나?' 어리둥절해하며 따라 내렸다. 주변에는 서부영화에서 본 듯한 황량한 대지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향해 가리키며 “저기 좀 봐!”라고 소리쳤다. 커다란 구름이 걷히면서 서서히 그 존재를 드러냈다.

  테푸이를 실제로 보면 크게 감탄할 거라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 하니 ‘낯설다’는 느낌에 당황스러웠다. 구름이 더 걷어지자 하나둘 씩 나타나는 테푸이들은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낯선 존재가 네모 반듯한 돌덩이를 툭, 툭 놓고 간 것처럼 이 세상과는 이질적이었다. 문득 ‘이런 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광경은 신비로우면서도 이상하게 두려움을 일으켰다. 외계인을 보게 된다면 지금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될 거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테푸이를 바라보았다.


 투어가 끝나고 클라우디오와 알레한드로는 8시 버스로 앙헬 폭포가 있는 시우닷 볼리바르로 넘어간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짐을 챙기고 나와 알롱은 6시에 약속을 잡아둔 포사다 미쉘과 연계된 투어사의 프란시스코 씨를 만난 뒤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와 알롱은 포사다 미쉘 앞에서 프란시스코 씨를 기다리는데 어느새 칠레에서 온 조나단도 우리와 함께 그를 기다렸다. 순식간에 트레킹 멤버가 세 명이 되었다.


 프란시스코 씨는 어제 나와의 약속을 어겨 만나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때마침 백패커스 투어 관계자인 에릭이 와서 우리에게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 보니 여자 두 명이 더 있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온 민과 홀리이다.

 

 에릭은 로라이마 트레킹에 대해서 그림까지 그리며 꼼꼼히 설명을 해주었다. 알롱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독일인이라 신뢰가 가.”라고 속삭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채식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거다. 남미는 여러 국적의 다양한 사람이 방문하는 여행지인 만큼 어디에서나 채식인을 위한 식단이 있어 큰 불편함을 없이 여행할 수 있다. 우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에릭과 악수를 하며 내일 아침 10시에 계약을 마무리하고 바로 트레킹을 떠나기로 정했다.

 

 다시 만난 알레한드로는 자신은 베네수엘라에 좀 더 머물다 가니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라며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를 살짝 안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무뚝뚝한 클라우디오 역시 내 앞에 스윽 다가오더니 조심히 여행을 잘하라고 말해주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서로의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었다. 여행에서는 만남도 헤어짐도 너무나도 빠르다.


 다음날 아침 계약을 하러 갔을 때 사무실 주변이 북적였다.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여 깜짝 놀랐다. 기존 멤버에다가 밴쿠버에서 온 앤드류, 일본에서 온 사쿠, 기아나 프란스에서 온 스테파니와 그녀의 친구(이야기를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까지 총 9명의 멤버가 모였다. 다들 어디에 있다가 당일에서야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숨겨져 있던 테푸이가 구름이 걷혀 모습을 드러내듯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한 팀이 되어 5박 6일의 대장정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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