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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당근 Dec 12. 2021

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것

로라이마


 배낭여행자는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자처해서 힘든 길로 돌아간다. 그리고 위험해 보이고 고생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 선다. 그래서 구태여 트레킹 같은 걸 신청하는 거다.


 물론 트레킹을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곳에만 존재하는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서’라고 간단하게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런 풍경은 굳이 산을 오르고 구르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괜한 힘을 빼는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많다. 가령  멋진 뷰가 한눈에 보이는 스폿에 앉아서 따뜻한 차나 와인을 마시며 여유롭게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혹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헬기를 빌려 거대한 산을 크게 빙 둘러봐도 된다. 그 편이 풍경을 담기에 적격이다. 실제로 로라이마에 헬리콥터를 타고 관광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나는 배낭여행자가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물론 나를 포함하여 사정이 여의치 않는 배낭여행자가 많지만). 이들은 다른 선택지가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자발적으로 트레킹에 참여한다. 단순히 보는 것과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건 다른 차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배낭여행자들은 어떤 이유에서 산을 오르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떤 성취감이나 카타르시스를 원할 수 있고 아니라면 단순히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할 수도 있다. 혹은 일종의 수행으로 몸과 정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우선 나부터 산에 오르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나의 육체적 한계를 시험하고 싶다는 게 가장 크다.

 
 하지만 그곳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그 이유 같은 건 쉽게 놓쳐버린다. 자신을 시험하고 싶다는 생각에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끼다가도 그와는 전혀 다르게 이곳에 가야만 한다는 강렬한 이끌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의적이었든 어떤 힘에 의해 끌어당겨졌든 어쨌든 발을 들여놓은 이상 끝을 봐야 한다.





~첫째 날~


 로라이마 트레킹 멤버들은 서로 간단한 통성명과 국적만 밝힌 채 곧장 흰 지프에 몸을 실어야 했다. 해가 지기 전에 베이스캠프에 안전하게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 한 대에 9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두 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문을 열어보니 뒷공간이 꽤 널찍했다. 그렇다고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착착 밀착된 채로 출발해야 했다.

 
 나는 사람과 가까워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 좁은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영 불편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걱정했던 건 영어실력 이전에 친화력이었다. 여행 에세이를 읽다 보면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인 것처럼 밝은 표정으로 외국인과 어깨동무하는 사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자리에 활짝 웃는 나를 대입하기란 영 쉽지 않다. 6일 동안 어떻게 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이곳에서는 내가 나이가 가장 어리기도 하여 더욱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쉽지 않았다. 차 안에는 스페인어와 영어가 활기차게 오갔으나 홀로 다른 공간에 있는 듯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차가 멈춰 섰다. 어느새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각자 자신의 배낭을 챙겨 어깨에 메고 내렸다. 우리의 눈앞에는 수풀들 사이로 로라이마까지 이어져 이 있는 기다란 길이 펼쳐져 있었다.

 
 5박 6일을 보내는 만큼 짐이 많아 배낭의 무게가 꽤 무거웠다. ‘과연 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긴 시간을 걸을 수 있을까?’하고 걱정하는 것도 잠시 바로 옆에서 포터가 자신의 키만큼 짐을 쌓아 매는 걸 보고는 그런 불평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 짐에는 우리 모두가 먹을 음식과 조리기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에 따라 그러나 너무 멀어지지 않는 보폭으로 로라이마를 향해 걸었다. 길의 끝에는 로라이마 산과 쌍둥이 산 쿠케난이 함께 붙어있어 더 거대한 부피감으로 위엄을 뽐내었다. 구름이 산의 주위를 감싸고 있어 신비로움도 살짝 가미되었다. 구름 사이로 아른거리는 로라이마가 얼른 이곳으로 오라며 손짓하는 것만 같다.





 무성한 수풀 사이 황량해 보이는 기다란 길 하나. 그 끝에는 내가 꿈꾸던 그곳, 로라이마가 기다리고 있다.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 차 햇빛이 강하지 않아 다행이다. 언제부턴가 자외선에 굉장히 약해져 강한 햇빛에 조금만 노출되어도 기운을 몽땅 빼앗겨버린다.


 우리는 따로 또 같이 길을 걸었다. 나는 일본인 사쿠와 함께 걷다가 혼자 걸었다. 그러다 미국에서 온 민과 알리와 함께 걷다가 또다시 혼자 나아갔다. 스페인어를 거의 못하는 나는 포터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가끔 엄지를 척 올리며 서로 응원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사쿠는 내가 사는 고향의 조선소에 업무차 세 번 정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철강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지금은 그만두고 세계여행 중이다. 세 번씩이나 내 고향에 방문한 일본인을 로라이마 트레킹 멤버로 만나게 될 줄이야. 엄청난 인연이구나! 그는 다부진 몸에 턱수염을 살짝 길렀고 눈빛이 또렷하여 한눈에 강인하고 건강한 사람이라 느꼈다. 일본인은 영어 발음이 안 좋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깜짝 놀랐다. 그는 한국인과 생김새가 비슷하여 차에 타기 전 그를 처음 봤을 때 ‘한국말로 인사를 해야 하나?’하고 긴가 민가 했었다. 반대로 그는 나를 보며 ‘일본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여 조금 우스웠다.


   종종 리더가 나에게 다가와 컨디션이 괜찮은지 살펴봐주었다. 그는 키는 작지만 단단한 몸에 우직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언제나 친근하게 멤버들에게 다가왔고 쾌활하게 에너지를 북돋아주며 그룹을 이끌었다.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이 길은 평지라 걷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돌덩이가 하나씩 추가되는 것처럼 배낭이 점점 무겁게 느껴지는 데 있었다. 내다 버릴 수도 없으니 이를 악 물고 버티는 수밖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기까지 총 네 시간 반이 걸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가장 늦게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크게 안심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 그룹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멤버(혹은 짐)가 되는 건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다.  


  베이스캠프에는 풀 한 포기 없는 휑한 공터에 다 쓰러질 것 같은 나무로 만든 집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이 한 두 평 남짓한 집 안에서 다 같이 잘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던 차에 포터들이 아주 능숙하게 텐트 여러 개를 착착 세워 올렸다. 텐트는 성인 두 명이 딱 붙어 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오두막집 바로 옆에는 기다란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다들 지쳐서 주변에 짐을 대충 풀어놓고 옷가지와 배낭은 지붕 아래에 대롱대롱 걸어 놓았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시원한 물을 마시며 크게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나는 바리바리 싸 온 그레놀라 하나를 단숨에 먹어치웠다. 포터는 어느새 요리사로 탈바꿈하여 우리를 위한 저녁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비록 핫케이크와 초코맛이 거의 안나는 밍밍한 코코아였지만 지치고 피로한 우리에게는 고급 요리를 먹는 기쁨과 다를 바 없었다.


  어느새 베이스캠프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우리는 랜턴을 켜고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서로 사는 곳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이런 멋진 곳에 함께 한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스쳐가는 인연이 될지 오래 함께하는 인연이 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5박 6일간 동거 동락하며 소중한 순간을 함께 나눈 다는 것이다.


  오래 앉아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여 주변을 휘적휘적 걷는데 사쿠의 손가락 끝이 하늘을 가리켰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밤하늘이 보석같이 반짝이는 별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수많은 별들이 가득했다.


 마치 우주에 있는 듯한 환상적인 기분이 들다가도 내게로 별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사쿠가 다가와 ‘우유니 사막에서도 이런 멋진 밤하늘을 볼 수 있을 거야’라고 귀띔해 주었다. 다시 한번 멋진 밤하늘을 볼 수 있다니! 너무나도 기뻤다. 이 황홀경은 이 근방에 사는 누군가에게는 흔한 밤하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먼 곳에서 날아와 또다시 먼 길을 걸어온 내가 보는 하늘은 그들이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르겠지. 눈부신 별빛을 두 눈 가득 담으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남미에서의 하루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구나.





~둘째 날~     


 차갑고 습한 아침 공기로 가득한 텐트에서 눈을 떴다. 여름이라 못 견딜 만한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지만, 선뜻 몸을 일으키기는 힘들다. 어제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나 보다. 오래된 침낭에다 기능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는 얇은 매트를 깔고 잤으니 그럴 만도 하다.


 포터가 마련해준 작은 텐트에는 남자 둘, 여자 둘씩 짝을 맞춰 들어갔다. 9명이라 짝이 맞지 않은 나는 혼자 텐트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밤 사이 산짐승이 내려온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 무서웠지만, 텐트 안에 들어가 보니 1인용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작은 크기임을 확인하고는 혼자 쓰는 게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텐트 너머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보니 늦게 일어난 건 아닌가 보다. 조금만 더 자면 피로가 풀릴 것 같아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결국 빈 허공을 보며 눈만 깜빡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별 생각이 없다가도 문득 이곳이 남미라는 낯선 곳이라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럴 때면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텐트에서 나온 나는 눈앞의 광경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마리의 개미들이 커다란 마당을 모두 점령하고 내 텐트로 진격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얼른 신발을 챙겨 신고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탁자로 내달려 갔다. 일찍이 일어난 부지런한 친구들이 태연하게 웃으며 “Good moring.”, “Buenos dias.”하고 반갑게 맞이해 줬다. 알고 보니 이들도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뒤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움직이는 생물체는 찾아볼 수 없는 허허벌판이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새까만 개미떼가 같은 방향으로 기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기이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어느새 개미떼들이 곤히 잠들어 있는 다른 동료들의 텐트를 습격하려 하자 나는 원숭이처럼 다시 마당 안으로 폴짝폴짝 뛰어 들어가 텐트를 흔들며 호들갑스럽게 잠을 깨웠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었는지 등 뒤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여유를 되찾고서야 로라이마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아침의 로라이마는 여전히 근사했다. 낮과 밤 그리고 아침에 보는 로라이마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매력적이다. 낮에는 활기찬 에너지가 샘솟아 나오고, 밤에는 별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그리고 아침은 고요한 적막 속에서 더없이 신비롭고 고고해 보였다. 따뜻한 커피 한잔이  있었다면 더욱 완벽했을 거다.


 이런 순간이 소중한 걸 모두가 잘 알고 있다는 듯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이따금 고개를 돌려 로라이마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부신 아침햇살이 우리를 따사롭게 비춘다.






 우리는 요리사(겸 포터)가 준비한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겼다. 떠나기 전에 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제안에 모두 흔쾌히 좋다고 답했다. 로라이마를 배경으로 멋지게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하필 역광이라 모두 얼굴에 어둡게 그늘이 져 버렸다. 마치 위험한 전장에 가는 전사들처럼 나왔다. 차선책으로 로라이마의 바로 옆에 있는 쌍둥이산 쿠케난을 배경으로 다시 사진을 찍었다.


 쿠케난 역시 테푸이라서 누군가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며 로라이마에 등반했다고 말해도 아무도 못 알아챌 거다. 누군가에게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역광이라 로라이마를 배경으로 못 찍고 어쩔 수 없이 바로 옆에 있는 테푸이를 배경으로 찍었다고 구구절절 설명하긴 피곤하니까.


 쌍둥이 산이라고는 하지만 둘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로라이마가 평평하고 부드러운 인상이라면 쿠케난은 좀 더 각이 지고 강한 인상이다. 모범생 형과 날라리 동생이랄까? 쿠케난은 로라이마보다 낮지만 절벽이 심하게 나 있어 걸어서 등반할 수 없다고 한다. 암벽을 타던가 헬기로 정상에 오르는 수밖에 없다. 구름이 휘감은 와일드한 쿠케난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 우리는 여느 책 속에 나올법한 모험가처럼 멋졌다.      


 로라이마가 테푸이 중 그나마 걸어서 등반이 가능한 산이라 하더라도 가이드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선 표지판이 불친절하게 듬성듬성 자리 잡기도 하고(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길이 어디로 나아 있는지 일반 사람들의 육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기에 자칫 길을 잃기 쉽다. 그리고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심하여 발을 잘못 헛디딜 수 있으니 혼자 등반을 시도하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타지에서는 도심에서 길을 잃어도 잔뜩 긴장되고 불안해지는데 이런 오지에서는 더욱 패닉 상태가 될 거다. 이곳의 특성상 비가 갑자기 내려 계곡물이 불어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고립되기 십상이다.


 선두에 선 리더를 따라 우리는 차례로 길을 나섰다. 오늘은 로라이마 바로 아래 도입부 까지 가는 일정이다. 산 정상까지 오를 줄 알았던 나는 내심 아쉬웠다. 베이스캠프에서 로라이마를 바라봤을 때 바로 밑까지는 너무 쉽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른 정상을 올라가는 기쁨을 맛보고 싶기도 했다,


 나의 거만함을 비웃듯이 로라이마를 향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계곡을 두 개나 건너야 했고 평평할 줄만 알았던 길은 오르락내리락 여러 언덕을 넘어야 했다. 머리 위로는 강한 햇빛이 내리꽂았고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배낭의 무게 기진맥진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트레킹에 부적합한 나이키 러닝화로 인해 발아래 돌멩이의 각진 부분을 생생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와 발아래 모두 고통스러웠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선두에 서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쉬엄쉬엄 쉽게 이곳을 완등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쓰고 나니 어째 쓸데없는 고집 같기도 하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앞서가던 조나단이 걸음을 멈춰서 자신의 짐이 가볍다며 바꿔 드는 게 어떻겠냐며 물어봐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의 짐은 아주 단출했다. 얇은 비닐 가방에다 부피가 굉장히 작아 보였다. 그의 가방을 살짝 들어보며 아주 잠깐 흔들렸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난 괜찮아. 고마워”  

그는 씨익 웃고는 다시 돌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 역시 곧바로 뒤따라 걸었다.


 그 찰나의 마음을 되돌아보면 그저 나의 짐은 내가 짊어지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속 편히 내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홀가분하게 만들지 몰라도 결국 떳떳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건 나를 더욱 괴롭게 할 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무력감'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만 느껴져도 극도로 흔들렸다. 그래서 이곳에서 만큼은 더욱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이 짐을 지고 끝까지 완등하고 싶었다. 이 역시 괜한 고집 같기도 하다.


 여유로운 어느 날 시우닷 볼리바르의 한 숙소에서 조나단은 그런 나의 태도가 좋아 보였다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3시간 반 만에 산 아래 뷰포인트에 도착했다. 어제보다 한 시간 덜 걸렸으나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그에는 뜨거운 햇빛이 크게 한 몫했다. 그래도 멤버 중 세 번째로 도착하여 무척 기뻤다. 알롱과 사쿠가 나에게 트레킹을 잘한다며 칭찬해주어 더욱 으쓱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광활한 테푸이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아주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를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 주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곳곳에 안개가 무겁고 짙게 깔려있었다. 그 덩어리가 꽤 커서 구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구름과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저 너머에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고, 절벽 한쪽에는 아주 기다랗게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대자연 속의 로라이마는 더욱 장엄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몸을 한 바퀴 빙 돌려가며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곳을 두 눈에 담고자 했다.


 출발하기 직전 정상까지 빨리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했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그저 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허무한 트레킹을 했더라면 이 멋진 곳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을 거다. 그랬다면 두고두고 아쉬움 남았겠지.


 석양이 천천히 저물고 있다. 저 멀리서 거대한 테푸이를 집어삼키는 어둠이 서서히 다가온다. 다채로운 주홍빛 석양을 천천히 삼키는 어스름에 왈칵하고 벅찬 감정을 느낀다. 겨우 하루가 끝날뿐인데.


이번엔 맥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다.





~셋째 날~     


 본격적으로 로라이마 산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듯했다. 울창한 숲은 그 거대한 크기만큼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양 볼과 두 손 모두 기분 좋게 촉촉해져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고개를 드니 울창한 나무들이 어제 나를 괴롭히던 뜨거운 태양을 서늘할 정도로 가려주고 있었다. 숨 쉴 때마다 상쾌한 숲 내음이 들어가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와! 다람쥐 같아!"     


 가파른 산 길을 빠른 속도로 오르는 나를 보면서 알렉스가 말했다. 포터인 알렌도 잘 오른다며 칭찬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엄지를 척하고 올렸다. 그 열성적인 반응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힘을 주어 발돋움했다. 체력을 적절히 안배하지 않고서 초반부터 냅다 속력을 냈다. 드디어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는 설렘에 마음이 급해진 거다.     


 산길은 생각보다 더욱 험난했다. 상당히 비탈진 길이 곳곳에 나 있어 기어가다시피 해야 겨우 오를 수 있었다. 어제 캠프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손 내밀면 다다를 것 같은 꼭대기를 바라보며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이렇게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땀을 잔뜩 흘리고 나서야 크나큰 착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길이다.      


 산행 도중에야 캠프에서는 보이지 않던 다른 팀 멤버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며 고생한다는 것만으로도 동료애를 느꼈다. 그래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응원의 눈길을 강하게 내비쳤다(그들이 알아챘을지는 미지수지만). 내가 갈 길을 몰라 허둥대자 다른 팀 가이드가 어디선가 나타나 길을 알려줬다. 이상하게 그와는 템포가 맞아 함께 쉬어가는 타이밍에 그레놀라를 나눠먹으며 서로를 북돋아주었다. 물론 대화는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산을 오르는 데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잡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점령한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또다시 떠올리고야 만 거다. 뒤이어 마음 한구석에서 '힘들어 죽겠는데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야?'라고 소리쳤지만, 어쩌면 이곳에 온 이유를 환기해야 그나마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고통을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내 여행은 그 소임을 다했다고 느꼈다가도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한계'를 시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건 비단 육체적인 한계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이유는 없는데 말이지. 


 나를 포함한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의문이 갑작스럽게 밀려들어왔지만 늘 그렇듯 썰물처럼 스르르 어디론가 들어가 버렸다. 새하얀 거품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그러나 두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정상에 다다르자 길이 끊기면서 가려졌던 하늘이 완전히 드러났다. 지친 어깨를 토닥이듯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웅장하고도 아름다웠다. 가까이에서 만져지는 뭉그러진 구름 덩어리도, 발아래 피어오른 구름바다도 너무나도 신기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아찔한 높이에 소름이 오소소- 올랐다. 안전 가이드라인과 같은 게 전혀 없어 까딱 잘못하다간 추락하기 십상이었다.      


 사실 나의 취향은 로라이마의 전체적인 모습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산 아래 베이스캠프의 뷰이긴 했으나 상상만 하던 로라이마의 정상을 포기하지 않고 올라온 것에 더없이 기쁨이 느껴졌다. 미지의 땅을 발견한 모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멤버 중에 알롱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 그는 카메라로 이것저것 찍으면 올라오느라 속도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에 그가 세계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프로라고 믿을 정도의 굉장한 실력이었다.       


 멤버들이 모두 정상에 도착한 걸 확인한 가이드가 함께 수쿠리 호텔로 이동하자고 했다. '이곳에 호텔이 지어졌다고?' 하며 기대 반 의심반으로 따라갔다. 조금 더 걷자 바위로 된 지형이 끝나고 흙으로 된 길이 나왔다. 누군가 눈을 가리고 헬기에 태운 뒤 뚝 떨어뜨려 놓는다면, 이곳이 산 꼭대기라는 것을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넓은 평지이다. 도중에 자쿠지라고 수영을 할 수 있는 깨끗한 자연 풀장이 있었는데  몇 명은 들어가서 수영을 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가이드의 발길이 멈춰 선 곳은 오목하게 들어간 커다란 바위 형지. 바위가 든든한 지붕과 평평한 야영지가 되어 텐트를 치기 안성맞춤이었다. 아, 이곳이 호텔이군. 조금 허무해진 순간이다. 하긴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로라이마 꼭대기에 호텔이 지어진다면 마진이 별로 남지 않을 거다. 게다가 가족, 친구들과 생이별해야 하는 호텔 직원들은 무슨 고생인가.      


 수쿠리 호텔 주변 경관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특히나 바로 앞에 비가 고여서 만들어진 호수가 환상적이었다. 그 고요하고 푸른 물은 요동도 없이 거울처럼 하늘을 그대로 비추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모네의 그림 같기도 하다. 평온한 호수에 괜스레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져 본다. 잔잔한 파동이 아름답게 퍼져나간다.     






 밤이 되자 우리는 한층 더 가까워진 별 무더기 아래 모였다. 불을 피운 주변에서 빙 둘러앉아 오늘의 무용담을 나누며 큰 소리로 웃었다. 어색하기만 했던 우리는 어느새 눈을 마주치며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였다.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서로를 향한 눈길은 너무나 따스했다.     


 오늘 밤부터는 혼자 텐트를 쓰지 않는다. 지난 이틀 밤 동안 알렉스가 코를 심하게 고는 탓에 조나단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나에게 함께 텐트를 쓸 수 있는지 제안한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부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잠을 편히 못 자는 건 상당히 고통스러운 거니까. 게다가 오늘은 정말 피곤한 날이지 않은가. 좁은 공간에 둘이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금세 기우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수학여행에 온 것처럼 조나단과 밤늦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게 스페인어를 배우기도 했는데 내 형편없는 스페인어 실력 때문에 둘 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러다 결국 옆 텐트에 있는 동료로부터 한 소리를 들었다.  

    

"미안한데 작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아차.




~넷째 날~

 오늘은 정상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는 일정이다. 5박 6일 일정 중 유일하게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하루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로라이마 정상 끝자락에 위치한 윈도우 포인트에 가보기로 했다. 트리플 포인트라고 해서 베네수엘라, 브라질, 가이아나 3국이 맞닿는 지점까지 가는 코스도 있었으나 가이드가 그곳은 특별히 볼 게 없어 굳이 안 가도 괜찮다고 했다. 게다가 왕복 8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더욱 갈 마음이 사라졌다.

 윈도우 포인트는 바위 사이로 네모난 창문이 만들어진 포토 스폿이다. 큰 감흥을 일으키는 포인트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거대한 창문처럼 시원하게 뚫려있는 환상적인 절벽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발아래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을 보자니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로라이마가 스르르 이동할 것만 같다.



 어느새 우리는 이곳의 엄청난 높이에 익숙해져 바위 끝에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 대범해졌다. 저 멀리에 서 있는 동료를 서로 찍어주기도 했다. 조나단은 크게 두 손을 흔들고 점프를 하는 과감함까지 보였다. 그는 이후에 페이스북으로 스카이 점프를 하는 영상도 보내주었는데 역시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포터들은 우리를 훨씬 뛰어넘었다. 어떻게 내려갔는지 저어기 아래 아슬아슬한 절벽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소화가 되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들에게 어떻게 내려갔는지 소리쳐 물으니 빙 돌아 내려가는 길을 알려줬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조심조심 내려가 보았다. 잠깐 있는데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감이 들어 사진만 찍고 후다닥 올라와야 했다. 1분 이상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우리는 한참이나 윈도우 포인트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다시 캠핑장으로 걸어갔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 발가락에 잡힌 물집의 통증이 심해져 제대로 걷는 게 어려웠다. 물집이 건드려질 때마다 고통스러워 절뚝이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집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잠깐 멈춰 쪼그려 앉았다. 알롱도 걱정되었는지 함께 쪼그려 앉아 기다려줬다. 그러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어쩌다 첫 여행을 남미로 오게 된 거야?"

발가락을 살피다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남미는.. 여행을 많이 다닌 나에게도 오기 쉽지 않은 곳이란 말이지. 그런 곳을 어쩌다 첫 여행으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

 글쎄 왜 난 그 많은 곳들 중에 남미여야 했을까. 어쩌면 남미가 아닌 다른 곳일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도 충분히 멋진 경험들을 할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유일하게 그 앞에 보였던 것이 남미였다. 그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남미로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난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룬 적이 없어. 그래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서 왔어."

 이 말을 망설임 없이 내뱉어 버렸다. 게다가 전혀 떨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혼자 수없이 생각했을 때는 쉬이 내려지지 않던 답이 입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명확해졌다. 이런 물음에 담담하게 답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로라이마 정상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내가 동경하던 여느 책 속의 주인공처럼 나 역시 남미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만으로도 벅찬 마음이 들었다.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다섯째 날~

 지난날들을 통틀어 가장 힘든 날이다. 근육통 때문에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다리가 후들후들 거린다. 다리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아 두 손으로 다리 하나를 옮기고 다시 남은 다리를 옮기면서 겨우 앞으로 나아갔다(조금 과장하자면 말이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내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가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연거푸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게다가 바닥이 상당히 미끄러워 자칫 고꾸라질 수도 있다. 다리가 계속 풀리려고 하여 주저앉지 않도록 오로지 정신력으로 온몸을 지탱해야 했다. 근육은 도무지 아무 쓸모도 없었다. 너무나도 힘들고 지쳐만 간다. 전기장판을 틀어 따뜻하게 데워진 침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점점 정신이 흐려지고 두 눈이 감기려 했다. 정신을 놓다가 또 붙잡고를 반복하며 아래로 향했다.

 드디어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지가 나타났다. 너무 안도한 나머지 평지에 발이 닿고 몇 걸음 못 가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배낭이 무거웠던 터라 곧바로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다행히 반사적으로 손으로 땅을 짚어 얼굴을 들이박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뒤이어 오는 사람과 마주치는 민망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영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걸었다.

 비가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 이튿날 쉽게 건넜던 계곡 물이 엄청나게 불어있었다. 더 이상 사람이 건널 수 있는 깊이가 아니었다. 가이드는 카누에 멤버를 두 명씩 태운 뒤 거친 물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노를 저어 차례로 강 건너편으로 옮겨주었다. 그는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 멤버도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리는 모두 존경 어린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후 모든 일정이 끝나고 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 때 우리는 몇 번이고 이때를 언급하며 박수를 쳤다.  

 다음 계곡은 그전보다 얕았지만 폭이 훨씬 넓었으며 물살이 상당히 세찼다. 반대편 육지까지 길게 연결된 줄에 의지하여 강을 건너야 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두 손으로 줄을 단단히 잡았다. 거센 저항을 이겨내며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건넜다. 살기 위해서 줄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강을 건너는 내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엄청난 물살이었다. 만약 그 줄을 놓쳤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여러 고비를 넘어 간신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멤버들이 마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전우가 살아온 것처럼 나를 기쁘게 반겨주었다. 모두가 표정이 한결 부드럽고 온화하다. 한창 내려가는 도중에는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미간 사이 주름 하나씩 심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마 내 미간에는 두서 개 있었을 테지.

 다리 전체를 감싸는 통증이 여전히 선명하다. 하지만 산속에서의 기억은 조각처럼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다.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내 두 발로 로라이마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순순히 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떠밀리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까지 내가 확인하려던 건 무엇이었을까? 로라이마의 신성한 기운이 나에게 손짓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운명과 같은 것이라는 무책임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정체가 무엇이든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으면서 걸어 들어갔다. 그 힘에 맞설 수 있는 나임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니 로라이마는 첫날과 다름없이 고요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치열하게 산을 오르내리며 보낸 며칠간의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때 내 표정이 어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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