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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J Oct 22. 2024

그러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애도(愛道)] - 2023년 1월 15일 일요일 ②

병실마다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837호실은 모두가 커튼을 꼭 닫고 간간히 말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다. 

내 앞 쪽 베드의 환자가 간호사를 붙잡고 하소연을 한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그럴 필요 없다고, 

그렇게 일해봐야 나만 손해라고, 열심히 일한 대가가 이거라고. 간호사는 생각이 많아진다고 답한다. 


나도 덩달아 생각이 많아진다.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고, '내가 싫으면 남도 싫겠지. 그러니 내가 하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일을 자청하고, 업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이것저것 찾고 시도해 보고, 처리할 수 있는 업무 능력을 키우고, 경력에 맞는 능력치와 지위에 맞는 애티튜드를 보이려고 노력해 왔다. 그렇다고 승진을 빨리하는 것도,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같이 일하는 후배들에게 일 많이 해서 힘들다는 볼멘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그렇게 살았다. 비슷한 삶을 살아온 모르는 누군가가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러니까 너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살아서 이렇게 아프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말한다. 


근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떠올린다. 그래서 아프게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일했고, 힘들었던 경우도 있지만 대략 일이 즐겁고 보람 있었다. 적어도 진심으로 일하라고, 그게 맞다고 얘기하고 싶다. 와~~~~ 이거야 말로 불치병이다.           

이 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결론을 내리지 못한 부분이다. 사실 내 마음도 이랬다 저랬다 하니까...


아침부터 답도 없는 문제를 생각하느라 입에서 뭔가가 당긴다. 배가 고프지는 않은데...

뭘 먹고 싶은 건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언니가 사다 놓은 봉지를 뒤적거리다가 시원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캔커피를 손에 잡았지만 기왕에 먹을거면 향 좋은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어 지하 마트로 갔다. 

이런, 내려먹는 원두커피가 없네.

아직 커피는 마시지 말라는 얘긴가 보다 하며 이리저리 먹을거리를 살펴보다가 세상에... 롤케익과 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였다. 갑자기 식욕이 확 당긴다. 


며칠 만에 일상이 이렇게도 떨어져 있었구나. 내가 아프구나. 

현실감이 확 온다. 뭔가를 계속 조심해야 한다는 현실. 이런 느낌이 왜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뾰족해지고 괜한 심술이 난다. 내가 잘못 살아온 게 아닌데 왜 내가 살아온 일상에 변화를 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커피 정도는 우아하게 마시고 싶어졌다. 1층 카페로 올라가 갓 내린 커피를 샀다. 역시...


병동으로 와서 8층 로비로 갔다. 커피와 롤케익을 먹으며 앉아 있으니 복도를 오가는 다른 환자들이 보인다. 이곳 8층은 여성암 환자들의 병동이다. 그래서 서로의 상황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머리카락이 있는지 없는지로 병의 경중이 보인다. 그래서 보통의 용기가 아니면 말 걸기가 어렵다. 나보다 아픈 사람한테는 실례가 될까, 나보다 덜 아픈 사람한테는 부러움에 말 걸기 싫어진다. (나 참 까칠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거침없이 말을 걸어온다. 나보다 먼저 겪은 환자들의 생생한 투병 얘기가 위로가 된다. 

아는 게 힘이라고 그랬던가?


금방 한두 시간이 지나고 병실로 돌아왔다. 커튼을 닫고 혼자 있으니 좀 전에 들었던 투병 얘기가 갑자기 불안함으로 느껴진다. 어제 찾아본 유방암 관련 유튜브 내용과 겹쳐지면서 맘이 불편해졌다. 

아는 게... 병이다.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게 됐다. 항암을 하게 되면 휴직을 해야 되는 건가? 그럼 상반기 근무평정은? 그럼 승진은? 이 와중에 이런 미친 생각을? 하겠지만,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것만을 보고 살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일했고 이제 결실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꽤 오래 하긴 했다. 후배들이 인정하는 일 잘하고 일 많이 하는 선배 3명 중 한 명이 아니더냐 내가. 

갑자기 기분이 나아진다. Etta J. Wilson Elementary School 뒷동산에 있는 큰 나무 밑에서 느끼던 산뜻한 바람을 맞는 것처럼...

나는 그런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승진해야겠다. 뭘 자꾸 내려놓으라는 건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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