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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야기 2.

두 번째, 블루와의 만남,

by 정현주 변호사 Dec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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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았지만 우물 밖에는 검은 강의 바다가 있었어. 그 검은 강의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으로 뒤덮여 있었지. 그러니까 우물 밖으로 나가더라도 바로 바깥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야. 그 구조는 무척 독특한 느낌이었어. 마치 광활한 대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데 그 한가운데 난데없이 낭떠러지와 같은 우물이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우물을 제외하고는 땅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수단은 전혀 없었어. 우물이 어찌나 깊은지 마치 행성의 핵을 향해 누군가가 아주 오랫동안 공간을 판 듯한 느낌마저 들었어.


내가 있는 우물 바로 옆(사실상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긴 했지만)으로 바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 검은 강의 바다였어. 이곳은 하늘과 땅이 같아. 모든 것이 어둠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야. 얇게 잘려나간 듯 날렵한 초승달의 빛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선명한 어둠이었기에 바다의 끝은 보이지 않았어. 그 끝을 알 수도 없었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 모래사장을 걸으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어디를 갈 수 있을지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모든 공간은 지나치게 넓었고 광대했어.


끝없이 밀려오던 바다는 서로가 부딪히면서 천둥과 같은 소리를 냈어. 그 소리가 끝나는 순간, 물들은 본연의 에너지를 잃고 힘없이 산산이 부서졌어. 그리고 흩어졌지. 완전한 무(無)로 향해가는 죽음처럼. 그 반복적인 파도의 흩어짐은 늘 비슷한 형태라고 해도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지.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은 그것이 유일했어. 다른 모든 고요한 것들은 그 밤의 어둠에 잠식되어 고요했어. 지나치게.


검은 강의 바다가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천둥과도 같은 소리를 만들어내서였을까, 어쩌면 그 덕분에 나 스스로 그림 속에 박제되어 있지 않고 아직 살아있다는 위안을 얻으려는지 나는 바다 바로 옆에서 하염없이 걸었어. 어디로 가는지 그 지점을 알지 못한 채로 말이야. 어차피 끝이 없었으니까.


모든 색이 흐려진 그 광활한 세계에서 맨발로 걸을 때 서걱거리던 그 차가운 감촉을 너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화이트가 떠난 후 얼마나 지났을까? 우물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던 나는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어. 문득 이곳으로 오기 전, 몇 번 데이트를 했던 상대가 했던 말이 생각났어.


 ' 외롭지는 않았어. 그저 무료했을 뿐이야. '


그는 말했었어.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 꽤 오랫동안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고. 그는 운동을 하는 것을 좋아해서 코트에 나가 자주 테니스를 쳤다고 해.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면 불필요한 생각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명명백백(明明白白) 심플해지기도 했다는 거야. 혼자 있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자연스럽게 마음에 드는 상대도 가끔 만날 수 있었지. 사람들과의 만남이란 조금만 신경 쓰면 금방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혼자 있는 시간은 덤이었지. 오히려 좋았어. 일단은 무척 자유로웠으니까. 하지만 모든 관계가 조금은 어슷하게 빗나가는 느낌이 들었어. 이를테면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특별한 느낌이 없었던 거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결정적인 것이 빠져있다는 기분이 들었어. 꽤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고 그는 오래된 나무 고목처럼 굳어졌어. 마음은 그대로인 채 어느새 나이가 많이 들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는 그렇게 말했어. 외롭지는 않았지만 무료한 삶이라고.


우물에 있던 나는 조금씩 후회감이 밀려왔어. 어쩌면 화이트란 존재가 왔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그 전의 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라는 것이 사실상 없었던 상태에 가까웠는데 말이야. 그가 '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어. '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준 덕분에 나는 비로소 어떤 자각을 하게 된 거야.


 ' 나는 왜 화이트의 말대로 이곳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


이 물음은 꼬리가 되어 계속 이어졌어. 그리고 나는 생각했지. 나는 분명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나의 어딘가 마음속 깊은 곳에 치유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이곳, 우물에 앉아있게 된 거야. 그리고 나는 분명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종류의 결핍감과는 조금 달랐지. 나는 그냥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어. 뭔가 지나치게 다르고 괴이한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을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목이 탄 듯 루이보스티를 조금 마셨다. 우리가 앉아 있던 한남동의 2층 카페는 통창이 있어 한남오거리가 바로 내려다보였다. 그녀는 무심히 밖을 보며 언제나 그렇듯이 마른 해바라기씨가 가득 붙은 브뤠첸을 세상에서 가장 맛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으로 조금씩 뜯어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그리고 루이보스티를 마시고 나를 보면서 말했다.


' 우리 나가서 걸을까? 조금은 추울지도 모르겠지만. '


우리는 카페에서 내려와 언덕길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전형적으로 차갑고 맑은 겨울의 날씨였다. 나는 카키색의 무스탕 코트를 입고 그녀는 목까지 올라오는 베이지색 파카에 파란색 진을 입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그녀를 앳된 소녀처럼 보이게 했다. 문득 오른편에서 걷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니 얼굴색이 창백해 보였다. ' 추워? ' 나의 물음에 그녀는 ' 아니ㅡ 괜찮아, '라고 대답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은 비스듬했다. 늘 비슷하게 걸어 올라가던 오르막길 근처에는 여러 가지 소품을 팔고 있는 작은 공방, 독일빵을 팔고 있는 베이커리 가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그녀가 자주 가던 카페들도 몇몇 있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버린 어중간한 시간에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계란과 토마토 시금치가 들어간 오믈렛과 호밀빵을 먹으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떠한 시간적인 한계가 없는 때였다. 나는 그때의 그녀의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좋아했다.


' 그래서, 너는 언제 우물에서 나가기로 한 거야? '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가며 나는 물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추운 듯 어딘가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귀는 빨갛게 물들고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앞만 보며 묵묵히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그녀는 내 질문에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하다가 결심한 듯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화이트가 가고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난 이후였어. 내가 우물에서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쩌면 작은 계기였지. 나는 우물에 앉아서 예쁘고 차가운 달을 바라보는 것이 익숙해졌어. 어느 정도는 편하고 좋은 느낌까지 들 정도로. 그곳은 그 어떤 것으로도 나를 해할 수 없었고 고요하고 완전한 세계였거든.


어느 순간 나는 그 우물의 끝까지 올라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가능해졌지. 벽을 잡고 올라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의식을 조금 집중하면, 힘들이지 않고 우물의 끝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야. 나는 우물의 끝으로 나가 이내 그 검은 강의 바다를 보았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의 소리를 들었지. 그리고 늘 파도들이 부딪혀 하얗게 흩어지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걷곤 했어. 조금 더 의식을 집중하면 나는 현실 세계의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떠올릴 수 있었지. 아마도 나는 잊고 싶은 기억이 있는 걸 거야. 하지만 잊어버리면 안 되는 어떤 것들. 이미 상실되고 부서졌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어떤 것들이 봉인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는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런 생각들에 잠겨갈 무렵에, 나는 검은 강의 바다에 누워있는 그를 만났어.


그는 화이트와는 달랐어. 화이트가 왔을 때는 나는 우물 끝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지. 그래서 검은 강의 바다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어. 그의 존재가 일종의 안온함을 주기는 했지만 내 마음에 행동을 위한 직접적인 계기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어. 오히려 그가 사라진 후, 비어있는 그 빈자리 덕분에 나는 외로움과 고독감, 허무감을 알게 되었지. 내가 손쉽게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종종 답답함을 느끼게도 되었어.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내가 결국 우물의 끝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화이트가 나에게 준 것은 그런 작은 파문과 같은 것이었어. 그래서 바다에 누워있는 사람을 봤을 때, 난 조금은 더 상황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지.


그래서 나는 그를 깨웠어.


그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블루(그는 바다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우리는 그렇게 칭하기로 했다)라고 한다. 그녀는 블루가 깨어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을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어차피 이곳은 허기짐을 느껴지지 않는 곳으로 얼마나 시간을 허비하고 있든 큰 상관은 없을 터였다. 그녀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블루 옆에 누워있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놀랍게도,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블루 옆에 있으면서(그는 죽어있지 않고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래도록 혼자 있다 보면 누군가가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을 그녀는 그때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블루는 어떠한 이유에서 화이트처럼 그녀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 아닌가? 검은 강의 바다와 우물이 있고 영원히 모양이 변하지 않을 듯한 손톱달이 있는 시간이 멈춰있는 이 세계에.


그렇게 한 움큼의 시간이 지나고 블루가 깨어난 것은, 그녀의 의식 속에서는 적어도 한 참 뒤의 일이었다. 그녀는 우물에 돌아가는 것을 잊고 블루가 있는 검은 강의 바다에서 하염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떴을 때 진갈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헛 '


그녀는 낮게 탄식했다. 갈색 눈의 블루는 그녀를 보면서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잠든 그녀를 내려보았다는 듯이.


' 안녕. 수연아. '


그리고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친근했던 사람처럼 ㅡ.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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