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예술가가 많은 집에서 자랐다. 모든 면에서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내가, 가장 특별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아버지는 일반적인 회사원이었지만 고모는 전업화가였고, 어머니는 성악을 전공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소개로 만났다고 한다. 노총각인 아버지가 삼촌을 통해 어머니를 만난 것은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쯤이었다. 삼촌은 늘 다니던 교회에서 반주를 하던 앳된 어머니를 보고 아버지가 떠올렸다. 그는 그 둘을 보며, 어떤 비슷한 색깔의 자갈돌들을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조카에게 어머니를 소개해주면서 진심으로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너희들은 무엇인가 결이 비슷해. 그냥 그런 느낌이 있었어. 처음부터. ' 삼촌은 훗날 아버지에게 말했다.
친할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조각을 했다. 젊은 나이에서부터 시작되어 조각가로서의 삶이 꽤 진지하게 진행된 적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순수 조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결혼을 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직업을 가져야 했지만 조각의 꿈은 늘 마음속에 있었다. 결혼 후 태어난 딸이 화가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고 진지하게 말했을 때, 반대하지 않은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이처럼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뼛속 깊이 예술가의 피가 흘렀던 셈이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아버지가 성악을 전공하고 피아노를 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어머니에게 끌렸던 이유도, 또 삼촌이 어머니를 보면서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도 어쩌면 모두 운명이란 틀 안에서는 예견되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모두 고전 음악을 좋아했다. 아침은 주로 얇은 햄과 치즈, 호밀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로 간단히 식사를 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지만 각자의 삶과 신념에 어떠한 간섭도 최소로 했다. 겨울이 되면 시립교향악단에서 매년 준비하는 연말 음악회를 함께 가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어쩌면 이처럼 느슨하고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란 것은 나의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 역시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꽤 오랫동안 피아노를 배웠지만 피아노를 전공하기로 결정하기는 무엇인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악기 연주자'의 생명은 확실한 재능이다. 기본적으로 테크닉은 타고나야 하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경지에 이를 때 정확하고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려운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있다. 악기연주자는 테크닉적인 면에서는 무척 시야가 좁을지도 모른다.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피아노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악기 연주자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존재해야 할 '반짝임'이 내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숨죽이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오히려 내 길을 제대로 갈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나는 무엇이든 정확하게 스케치를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지라도, 그 사물의 본질은 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마에스트로에 가까웠던 셈이다. 나에게 그림이란 내가 보는 상대의 가장 빛나는 부분을 남기는 작업에 가까웠다. 그 사물의 본질을 스케치하여 잡아두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선가 내가 미대로 입시를 정한다고 했을 때, 본가의 어느 누구도 반대를 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들은 단 한 번도 나에게 공부를 할 것을 권유하지 않았다. 고3 입시 때, 삼촌만이 지나가는 말처럼 ' 미술 공부해서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그러냐? '라고 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삼촌의 그 걱정스러운 물음조차 예대를 진학하는 어린 조카를 바라보는 삼촌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이었을 뿐 어느 누구도 나의 구체적인 장래를 염려하지는 않았다. 무엇을 하든 방향을 잘 잡고 열심히만 하면 어떻게든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나를 둘러싼 느슨하고 여유로운 곳에서 성장하며 깨달았다.
3월의 봄, 나는 대학 입학을 핑계로 학교 근처의 작은 빌라에서 자취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어 서울로 상경했다. 본가에는 방학과 긴 연휴에만 잠깐씩 내려가게 되었지만 집안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상 집이 전주였으니 자취 외에는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다. 내가 법적으로도 성인이 되던 그해 3월은, 굉장히 늦은 날까지 함박눈이 내렸다. 보기만 해도 자유로운 눈이었다. 길은 얼어붙었고 군데군데 물과 얼음으로 변하여 미끌미끌했다.
나는 미대의 수많은 과중에서도 순수 미술을 선택했다. 주로 유화로 풍경을 그렸지만 사람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현실적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해야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그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이미지는 실제 하는 대상에서 나와야 했던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핵심과도 같은 본질성이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에도, 또 도시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사물의 본질은 신기루처럼 어느 순간 떠올랐다 슬며시 그 존재를 가리고 만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잠깐씩 빛을 내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반딧불이처럼.
어떤 경우에는 세심하게 집중을 하더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무감각하게 있을 때에도 그 본질성이 갑자기 느껴질 때가 있다. 과정과는 상관없이 그것이 떠오르면, 나는 대상의 본질을 눈에 담고 그 이미지를 구현한다. 그것은 '단 한 번만' 보아도 사진을 찍은 것처럼 머릿속에 저장된다. 그리고 그 외에는 바깥의 단단해진 벽을 허물어 본질적인 부분을 내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늘 꺼낸다고 표현해 왔다. 너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오직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어."
그녀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와 나는 당시 한남오거리에 있는 2층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곳은 오랫동안 독일에서 생활을 한 외국인이 연 카페였는데, 밤이 되면 도시의 야경이 꽤 아름다워서 근처에 사는 주재원들이 자주 드나들던 고풍스러운 곳이었다. 그녀는 주로 그 카페에서 해바라기씨가 가득 붙어있는 독일빵을 시켜 먹었다. 그녀는 커피를 좋아했지만 가끔은 루이보스로 우린 밀크티를 곁들였다.
나는 당시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벌써 일 년째 휴학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가끔 만나는 그녀는 학교를 잘 나가지 않는 듯했다. 창작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그림도 잘 그려지지 않는 때에는 절대로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 특히나 공모전과 같이 눈에 보이는 작업을 준비할 때는 항상 생각한 시점에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다른 '어떤 이유로' 학교를 잘 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학교에 가지 않게 한 다른 원인이 된 그 이유는 그녀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때 늘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말하자면 나의 작업 공간에 다만 몇 퍼센트 정도의 공간을 마련해 두고, 언제든지 그녀의 연락에 응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남겨둔 것이다. 그 드문드문한 연락을 강요해서도, 또 그 기다림을 드러내서도 절대로 안 될 것 같다는 일종의 확신이 들었다.
그날 밤, 몹시 지친 얼굴을 한 그녀는 2층 카페에 나타났다. 풍성한 머리는 풀어진 채로 어깨 뒤로 넘겼고, 종종 보았던 하얀색 블라우스와 파란색의 진을 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얼굴이 조금 더 여윈 것 같아 보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뭔가를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해 미안해. 혹시 내 연락을 기다린 것은 아니지? "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잠시 나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생각지 못한 물음에 나는 잠깐 당황했다.
" 음.. 아니야. 지금 공모전 준비 때문에 나도 정신이 없었어. 너는 어때, 잘 지냈지? "
" 아... 그렇구나. 공모전. "
그녀는 나의 대답에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 나를 보면서 살짝 웃었다. 그리고 한결 나아진 표정을 잠깐 짓고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보기 시작했다. 마침 붉은 노을이 짙게 드리워진 바깥의 해는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를 둘러싼 그 특별한 공간에 빛이 저물기 시작했다.
" 음, 나는 사실 잘 지내지 못했어. 오랫동안 너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그게 잘되지 않았어. 설명하자면 길지만, "
그리고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의 시간은 오랫동안 내가 기다려왔던 종류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나는 지금까지 와는 다른 공간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과 비교하자면 지금이 분명히 한결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고 나서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 사람은 사람으로서만 구원받을 수 있지, 그렇지? "
어느새 노을은 저 멀리 사라졌고 해는 완전히 지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우리는 한참 전에 식어버린 찻잔 앞에 함께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얀 손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나는 오랫동안,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렸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말이야. 그런데, 결국 나는 사랑을 택하지 않았어. 하준아. "
그것은 대답을 원하는 말은 아니었다.
" 그래서 나는 내가 몹시 겁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어. 새삼스럽게 말이야. 나는 그토록 사랑을 기다려왔으면서, 막상 사랑이 찾아오자 지구 끝까지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야. 물론 비겁한 생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 "
그녀는 나와는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이 공간의 청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내가 이곳에 없다는 명확한 사실은 내 마음을 조금 짓누르는 듯했지만, 나는 기꺼이 그녀의 친구로 남아주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그녀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 하지만 나는 이제 알게 되었어. 단언컨대, 오직 사랑을 하는, 또는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통해 구원을 원해. 삶은 언제나 고통과 가까이 있지. 인생의 대부분은 아무런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특별하지. 만약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야.
하지만 하준아, 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나 봐. 나는 결국 구원받지 못했어. "
그리고 그녀는 울었다.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왜 이렇게 감정적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느슨한 공기 속에 함께 머무르고 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그녀를 괴롭게 한 그 무엇도 지나가게 될 것이다. 이 불안도 잦아들 것이다.
그렇게 눈물로 완연히 번져가는 그녀의 아름다운 왼쪽 뺨, 아름다운 머리카락, 하얀 손가락. 상상 속에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그렇게 하염없이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 괜찮아.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
나는 말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