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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Nov 17. 2024

그때는 너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았어.


그 겨울, 아버지는 독일에 사는 친구로부터 아이스바인을 한 병 선물 받아 가져오셨다. 아이스바인은 도수는 일반 와인과 같지만 당도가 매우 높고 맛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아이스바인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통학을 위해 한남동 근처의 작은 빌라를 얻어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외국 주재원으로, 지금은 요르단인지 시리아인지 파견되어 벌써 수년간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형제가 없는 외동으로 자랐으며 어린 시절부터 주재원이신 아버지 덕분에 친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일찍부터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10대의 소녀였던 시절, 그녀는 집에 왜 부모님이 없는지를 설명하기 싫어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또 그녀는 자신이 친구의 집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라도 친구들의 집에 가면 일상처럼 당연히 어머니가 계시는 것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면 다들 단란하게 앉아 계란말이에 김치찌개와 같은 평범한 음식들을 먹는 광경을 그녀는 상상 속에서만 그릴 수 있었다. 그녀는 보통 혼자 식탁에 앉아 호박씨를 가득 넣은 브뤠첸과 약간의 과일, 햄과 치즈로 저녁을 먹었다. 오래전, 그녀가 잠시 독일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거의 매일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다.


친할머니는 전형적인 아들 바라기로, 손녀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살뜰하게 챙겨줄 수 있는 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을 마음먹었다. 어찌 되었든 어린 시절의 그녀는 평범한 또래의 소녀들과는 조금 다른 환경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집은 유복한 편이어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아버지에게 말을 하면(그녀는 또래 소녀와 달리 전화 또는 메일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마치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생물학적인 부모에게 원하는 것을 전하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아 허락되었다. 이를테면 ' 미술을 공부하고 싶다. **동에 있는 유명한 학원을 다니고 싶다. '라는 의사를 전화로 아버지에게 전달하면 아버지는 그 이유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는 학원에 등록이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이처럼 그녀는 원하는 공부나 학원은 (그것이 취미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나름 엄격한 기준이 있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용돈도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그녀는  보이지 않는 철저한 통제 속에 있었던 셈이다. 명확한 울타리가 있고 생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제공되었지만 무형적으로 필요한 본질적인 것은 통제된 세계. 그녀가 필요한 억만 년 떨어진 별에 사는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에는 거의 오지 않았고, 또 방학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가도 그녀를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느낌도 없었다.


그녀는 사실상 의무적으로 아버지를 대면하고, 그 외에는 필요한 말만 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가 하나뿐인 딸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 어찌 되었든 사랑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에게 맞지 않는 방식이라고 해도. '


시간이 갈수록 그녀 또한 아버지의 태도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녀 내부에 자라나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녀는 너무 오래전부터 지나치게 독립적으로 혼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린 그녀의 세계를 특수한 곳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들의 관심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대하듯이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다. 말하자면 나와 전혀 다르며, 관심이 없는 세계 속에 있지만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그곳에서 적응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깊고 좁은 우물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그때의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비교를 할 수 있는 잣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기가 힘들었다. 어떤 이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상대방이 보였지만 상대방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집은 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 길을 오르려면 버스에서 내리고도 등산을 하듯이 십여분을 더 올라가야 했다. 한 겨울에도 등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경사진 곳이었다. 나는 그 길을 오르며, 그녀가 집에서 내려와 이 길을 다시 올라가는 일이 귀찮아서 며칠씩 집에 머무르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녀는 매일같이 그 산길을 오르내렸다.


그날은 집에서 가져온 아이스바인을 백팩에 넣고 그녀를 만나러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물론 나로서는 그녀의 집을 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 나도 새로운 와인을 맛보고 싶은데, 다리를 좀 다쳐서 며칠간은 집에 있어야 하거든. 아니,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야. 술도 마실 수 있어. 아니 마시고 싶어. 응, 괜찮다면 우리 집으로 올래? "


나는 그녀가 불러주는 집 주소를 바로 옆에 있던 영수증 종이에 급하게 받아 적고, 아이스바인이 깨지지 않도록 스티로폼 충전재로 와인을 감싼 다음 소중한 물건을 대하듯이 백팩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닫으려다가 냉장고에 두었던 견과류가 생각이 났다. 하루에 필요한 만큼의 지방을 섭취하도록 땅콩이나 호두, 건포도들이 낱개로 포장되어 있는 것인데 명절 선물로 받은 것이다. 집에서는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먹지 않는다. 우선은 냉장고에서 포장 견과류를 3개 정도 꺼내 같이 백팩에 넣고 길을 나섰다.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지만 그녀의 집으로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힘겨워서 등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굴의 바깥쪽은 춥고 몸 안 쪽은 뜨거워서 온몸이 불에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침 차가운 바람이 코 끝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나는 잔기침을 하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만 보면서 걷다 보니 생각보다 꽤 높이 올라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집은 산과 이어지는 가장 마지막 집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공들여 3층 계단을 올라갔다. 오른발과 왼 발을 번갈아 계단에 오르는 순간순간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비탈길을 올라와서 숨이 차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에 긴장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일까? ',

'어쩌면 그녀는 나를 전혀 남자로 인식하지 않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젯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아주 맛있는 '아이스바인'이 들어왔고, 호주 애들레이드의 풍년이었던 시기에 수확했던 좋은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적당한 때에, 콜키지가 되는 가게에서 맛있는 문어샐러드나 치즈를 시켜서 함께 맛을 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연유인지 그녀는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갑자기 나를 집에 초대했다.


나는 머리가 잠시 혼란해진 상태로, 이유를 알 수 없이 뛰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이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번쩍 열리며 그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은 어딘가 창백했고 손목이 보이는 니트 재질의 하얀색 상의와 청색 반바지를 입고 있는 상태로 말이다.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로 서 있기가 불편한 듯 약간 어정쩡하게 문가에 기대 서 있었다.


"들어와, 이곳까지 나 말고는 올라오는 사람이 없는데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렸어, 바로 너라고 생각했지"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복도를 울렸다.




생각보다 넓은 거실 안에는 네모난 2인용 작은 식탁이 있었다. 그 위에는 2개의 잔과 에이스같이 생긴 과자, 청포도와 방울토마토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면서 이미 와인을 마실 준비를 어느 정도 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윗옷을 벗고, 식탁 의자뒤에 걸친 뒤에 백팩을 열어 아이스바인을 꺼냈다. 그리고 같이 가져온 와인 오프너를 이용하여 코르크마개를 땄다. 백팩에서 같이 가져온 견과류를 꺼낼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은 꺼내지 않고 나중에 먹고 싶어지면 꺼내기로 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따뜻하게 웃어주었지만 주로 테이블에 턱을 괴고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그런 때의 그녀의 눈의 초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순간은 흡사 한 겹의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장막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지 않는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저릿해질 때가 있었다. 그 시기의 그녀는 유독 창 밖을 보며 멍을 때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녀는 어떤 날은 날 의식했고, 또 어떤 날은 날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어쩌면 강하게 '나는 너와 가까이 있지만 가깝지 않고, 이 이상은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서로 말이 없는 공간에 그녀와 함께 있는 그 순간의 공기가 좋아서 그녀가 부를 때까지 말없이 와인을 마셨다.


" 고통이란 말이지. 말없이 받아들이는 거라고 배웠어.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 나에게 해줬던 말이야. "


와인을 두 잔쯤 마셨을 때일까? 그녀는 말 문을 열었다. 눈은 여전히 창 밖을 향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 그런데 그 사람은 이제 없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절의 그 사람이 없어져 버린 셈이지. 최근에 난 그것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었어. 사람과의 인연은 그저 한 시절, 시절을 함께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야. 그러니까 어떤 사람과의 질긴 인연은 그 시절이 좀 길어질 뿐이야. "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 예전에는 그런 시절들을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해도 흐르는 시간들을 견딜 수 없었어. 어렸지만 결국 사람은 나이를 먹고 모두 죽음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어. 지나치게 혼자 있는 시간들이 계속되서였을까? 어쩌면 나에게 밀려오는 감정들에게서 조금 '무딜 수는 없었던 것일까? 만약 그랬더라면 나는 사람들에게 더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었을까? "


' 왜 네가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해? '


' 나는 때때로 사람들의 마음이 보일 때가 있어. 상대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데도 말이야. 나는 사실 타인의 감정에 감응하는 능력이 있거든. '


그녀의 말에 의하자면 '감응'이란 스스로의 감정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을 마치 거울처럼 받아들이는 능력을 의미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어느 정도의 감응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상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이 무척 관심이 있는 사람의 기분을 섬세하게 신경 써서, 또는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아채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 선택의 여지없이 감응을 한다는 편에서 타인과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때때로 그녀의 '감응'은, 그녀가 전혀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 완전히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동한다. 어느 날 그녀는 꿈속에서 중학교 때 한참 친했지만 지금은 전혀 연락을 하지 않는 친구의 꿈을 꾼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그다음 날 저녁, 몇 년 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다. ' 오래간만이야, 어쩐지 네가 갑자기 많이 보고 싶더라고. ' 그녀는 어제저녁, 그녀의 친구가 그녀를 생각해서 스스로 감응을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의 감응 능력은 그녀의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다른 세계 속에서 지나치게 스스로에게 몰입한 나머지 타인의 섬세한 감정선을 읽어내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능력은 당연히 타인과의 관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녀는 자신의 '감응'능력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자신의 본질을 보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끌리고 가까이 있으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외롭고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알든 모르든) 저마다 고독한 세계에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을 알아주는 것은 '관심'에서 비롯되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히려 타인에게 무척 무관심한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마음을 때때로 그 자신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 그들은 그녀가 자신들과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상처들은 시작된다.




' 처음에는,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정말로 나의 본연의 감정들인지, 아니면 상대의 감정을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어. 지금도 그럴 때가 있어. 나도 어찌 되었든 감정의 교류라는 것을 하니까 말이야. 결국 감응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내가 상대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도록 만들어.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되었지. 어쩌면 나에게 감정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쪽에 가깝다고.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면 혼자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편한 일이라고. '


그녀는 나에게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것들을 말했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나 스스로가 아득히 가지고 싶었던 것들,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 나도 모르게 회피하고 싶었던 감정의 편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많은 말들을 나에게 하다가 또 갑자기 침묵을 하면서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따라가다 시간이 지나면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서야 그녀의 공간이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은 침실과 거실이 파티션으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로, 거실에는 아이보리색 계열의 장과 멀바우 나무로 된 나무의자와 식탁, 그리고 커다란 스피커가 있었다. 그녀의 집에는 tv가 없었다. 그녀가 언젠가 'tv를 보는 은 시간을 죽이는 기분이 들어서 싫어. '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창은 벽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커튼 사이로 비치는 빛의 각도로 보아 오후가 넘어가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꽤 오래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 앞에 앉아 참을성있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준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그녀는 적막을 깨고 오른쪽 얼굴에 턱을 괸 채, 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친하게 지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물론 학교에서 자주 만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말이야. 너는 어딘가,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달라 보였거든. "


그리고 그녀는 오른손으로 와인을 조금 더 따르고 더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들을 아주 세심하게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아까부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그녀의 행동에 더 관심이 갔다. 하지만 시선을 한 곳에 두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와 달리 나에게 집중하는 그녀를 보자, 갑자기 우리를 감도는 공기가 무겁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녀의 집이고 내가 도망갈 공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어디가 달라 보였는데?"


나는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술 대신에 물을 반 컵 정도 마셨다.


"우선은 너는 다른 남자들하고는 달라. 좀 자유롭다고 해야 하나.. 너는 나중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더라도 네가 가지고 있는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 그런 거 말이야. 다 같이 나이가 들면 시시해지는 그런 삶,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돈 버는 일 뭐 그런 거에만 관심 갖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넌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닮았다는 사실이야. "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후후후' 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들은 대부분 사실과 일치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의 나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특별하다고 말해주는 그녀에게 '아니야. 나는 사실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고, 네가 말한 듯이 자유롭지도 않아. 나는 오로지 책임감과 사명감만을 가지고 살고 있어. 그리고 그때는 그냥 너랑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함께 있었던 거야. 우리가 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라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말들로 인해 나는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은 그녀가 나를 남자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조금은 착각을 하거나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제대로 보고 있더라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음을. 물론 나는 지금도 그녀의 생각을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럴 때면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던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린다.


그 눈동자는 어딘가 지나치게 서정적이었다. 많은 생각이 담겨있었고 또 텅 비어있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득히 먼 곳에 있기도 했다. 마치 한 곳에 붙들리지 못하는 파도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은 와인을 생각보다 빨리 마셔서 내가 가져온 아이스바인은 바로 끝이 났다. 그러자 그녀는 깁스를 한 채로 약간 절뚝거리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두 캔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테이블에 앉아 말없이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음악 들을래? "


사실 나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듯이, 그녀는 말과 동시에 몸을 일으켜 익숙한 몸짓으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웅장한 교향곡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잘은 알 수 없었지만 무척 느리고 장엄하며 어딘가 슬픈 느낌이 드는 음악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곡은 브람스가 작곡한 Symphony No. 3 F major op. 90이었다. 브람스는 이 곡을 작곡하기 전 이탈리아를 계속 여행했다. 무려 6년에 걸쳐서 말이다. 그리고 브람스는 이탈리아에서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정성을 마음에 담게 된 것이 틀림없다. 그는 마음속에 품게 된 그 서정성을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음악으로 승화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 곡은 그 이후로도 나에게는 많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곡이 되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멈춘 채 브람스의  Symphony No. 3 F major op. 90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들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언제까지고 그녀가 머물다 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상처받은 내 마음만 머물렀다. 그 상흔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아서 나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몇 번이나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왼쪽 뺨,

완연히 번져가던 그녀의 눈물들을 떠올렸다.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그때 그녀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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