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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Jan 05. 2025

그 그림에 대하여

희재와의 만남



희재는 내가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였다. 졸업을 위한 공모전을 준비하던 중, 같은 과를 다니던 친구 녀석이 소개를 해줄테니 한 번 만나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던 것이 만남의 계기였다.


전주에서 올라온 이후의 나의 삶은 무척 단조로웠는데, 이미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모전 준비를 한 것을 제외하면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을 제외하면 나는 주로 오피스텔에 혼자 있었고, 필요한 때 그림을 그리거나 구상을 하거나 그녀, 수연을 만나는 일 말고는 딱히 특별한 일을 만들지 않았다.


수연과의 만남은 무척 불규칙적이어서, 어떤 날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까지 만날 때도 있었고 어떤 날에는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수연을 만나는 시간을 늘 기다렸지만, 나의 생활 자체는 전혀 흐트러짐이 오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필요한 사람들과의 교류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나의 세계에는 수연, 한 명이면 되었다. 다만 그녀는 그 당시 멀리 떠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흔들리는 파도와 같이 한 곳에 정박하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무척 특별한 삶을 살고 있어서 속박 자체를 싫어하기도 한다. 그녀는 그때 다른 세계에 있었다. 그녀가 누구를 만나는지, 나를 만나고 있지 않을 때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나를 편하게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의 기간인지는 모르더라도, 나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하여 어떤 것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런 어중간한 관계의 특별성 때문일까, 우리는 함께 있는 그 공간, 그 시간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듯이 몇 년 동안 일정선을 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선을 굳이 넘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순간, 수연은 완전히 떠나버리게 될 것임을 나는 알았다. 나는 급할 것이 없었다. 나는 적어도 이 세계에서 수연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희재를 만난 것은 동기의 부탁에 의해서였다. 나에게 그런 부탁을 잘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그날따라 그는 나에게 그녀를 꼭 만나보라고 했다.


약속 장소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였다. 나는 10분 전에 약속된 카페로 도착을 하였지만 그녀는 두 손을 테이블에 올려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색 스웨터와 남색 코듀로이 스커트를 입고 허리를 꼿꼿하게 핀 상태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있는 얼굴이었다.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는 오로지 그녀뿐이었기에, 나는 그녀가 오늘 만나기로 한 상대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 안녕하세요? 저는 이하준이라고 합니다. '


내가 인사하면서 맞은편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잠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살풋 웃으며 자신을 희재라고 소개했다. 귀밑으로 단정하게 자른 머리 사이로 달랑거리는 하얀색의 귀걸이가 언뜻 보였다. 그녀의 단발머리 덕분에 목이 훤하게 드러나보였는데 그 가냘픈 모습이 사슴을 연상하게 했다. 그녀는 누가 봐도 딱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린듯한 눈썹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이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살고 있는 곳은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으로, 여기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왔다고 한다.


서로 인사를 하고 함께 밖으로 나갈까 했지만, 밖은 무척 추워 보였으므로 우리는 이 카페에서 카펠리니 파스타와 샐러드를 먹기로 했다.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올 동안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최근에 본 영화이야기, 좋아하는 음식이야기들을 했다. 딱히 할 이야기가 없기도 했지만 무난한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식이 나오자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무엇인가 할 말이 남아있는 것처럼.


' 저는 오빠를 알고 있었어요. '


희재는 조용히 말했다. 사실은 오늘 이 자리도, 제가 부탁해서 만들어진 자리예요.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 나를 이미 알고 있다고? '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가 그녀를 이미 알고 있을 모든 가능성을 생각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혹시 모를 모든 기억의 연고점들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결고리는 찾을 수 없었다.


' 이거 영광인데.. 하지만 어떤 계기였는지 떠오르지 않아. '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동안 그녀는 빤히 내 눈을 바라보고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커피잔을 매만지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나에게 희재를 소개한 내 동기는 희재의 친오빠와 아는 사이인데, 셋이 가끔 만나 어울리면서 작년 대학 축제에 왔었다고. 그때 그녀는 우연히 축제에 출품되어 걸려있었던 나의 그림을 보았다. 어쩌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복도였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나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 그림을 발견하고 굉장히 놀랐다.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년에 축제로 출품했던 나의 그림을 떠올렸다. 나는 그때 한 인물을 구상했다. 그것은 우물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우물을 스케치하지는 않았고, 사람의 형태도 스케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밑그림처럼 보이는 어렴풋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아주 멀리서 바라본 어떤 정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우물 위에는 손톱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우물의 끝은 다른 세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광경은 멀리서 보면 바다 같아 보이기도 했고 모래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 그림에는 색이 없었다. 오로지 흑색의 어둠만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그림은 정교하지 않았고 어렴풋해서 어떤 것도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며칠 간을 잠을 자지 못했다. 마지막 이틀 정도는 제대로 먹는 것도 어려웠다. 나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내부에는 반드시 꺼내져야 할 실제하는 무엇인가가 있었고 나는 그 본질을 찾아내서 스케치를 하여 그렇게라도 묶어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작업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샐러드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 저는 정말 놀랐어요. 그 그림은 무엇인가 짙은 호소력이 있었거든요. 어쩌면 사람의 형체 같기도 했고 우물 속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고.. '


그리고 그녀는 나의 그림을 떠올리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했다. 그리고 이어서 샐러드에 곁들여 나온 구운 새우를 말없이 먹으면서 말했다. ' 고통스럽기도 했어요. 굉장히. '


그녀는 그 그림을 본 이후 한동안 잠이 들 때마다 그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 우물의 깊이는 끝이 없었다. 그야말로 끝없이 펼쳐지는 암흑과도 같았다. 그녀는 물론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꿈속에서의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치 주문에 걸린 것처럼. 종종 한 밤 중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잠을 깬 적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땀이 흥건했다. 왜 그토록 그 그림에 집착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 누구도 그 그림을 그토록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평상의 일인데 그녀만은 그 그림에 붙들리고 말았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선택되고 말았다.


'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정신없이 지내다가 결국 오빠 학교에 전화를 걸어 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알려달라고 했어요. '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꽤 귀찮은 절차가 있었다고 한다. 희재는 축제 기간 동안 그 방향에 걸려있던 그림을 설명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추상적인 그림이라 그 누구도 그 그림을 기억하지 못했다. 예상한 대로 그 그림의 모습은 모든 것이 어렴풋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물인지 바다인지 모래인지 사람인지 무엇하나 명확하지 않은 이상한 그림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따지고 보니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그림은 대학교 축제와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나 대학생이 출품을 할 만한 작품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그림은 오래된 대 저택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복도에 수십 년 전부터 걸려 있을 법한 그림이었다. 특이하고 명확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학교 측은 예상대로 그녀가 설명하는 그림이 그곳에 걸려 있다는 것을 잘 알지도 못했다. 또한 설사 알게 되더라도 개인정보 등의 이유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 대학교에서 공모전에 출품했던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물론 같이 축제를 갔던 오빠의 친구에게도 '그 그림 '에 대해서 물었다. ' 오빠 기억하지 않아? , 같이 보았었잖아. 그 복도에 걸려 있던 목탄으로 스케치되어 있던 그림 말이야. 단색으로 형체를 그리려다 말았던, 내가 한참을 보고 있었던. '

 

하지만 그 또한 그 그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그림이었음에도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몇 개월이 흘렀을까, 그녀는 우연히 그 대학교에서 공모를 한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축제에 걸려있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의 스케치를 찾았다. 그 그림을 제출한 사람은 '이하준'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하준'이라는 이름의 미대생을 오빠의 친구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일단 '이하준'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얼굴을 보면 무엇인가 이 답답함을 해소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그런데 결국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그러니까 오빠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오빠가 출품하신 작품 중에는 그 그림과 매우 비슷한 느낌의 스케치들이 있었어요. 저는 사실 그림을 알지 못해요. 그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고, 그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으로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


그리고 그녀는 무척이나 특별한 것을 바라보듯, 내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분명하게.


' 오빠, 오빠가 그 그림을 그리신 거죠? '


그 눈은 이미 무엇인가를 확신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면서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 그래. 맞아. 내가 그렸어. '




희재와 나는 카페에서 나와 내가 살고있던 오피스텔로 갔다. 그녀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여자를 집에 데리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희재는 그 그림이 마치 나의 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이 그곳에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오피스텔에 우리 둘만 남게 되자 그녀와 나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안았다. 그것은 마치 예견된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몸에서는 어디선가 맡아 본 비누향이 났다. 중,고등학교 때 스쳐 지나가면서 맡아 본 적이 있는 그런 익숙한 향이었다. 나는 희재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는 동안 그녀는 내 팔을 잡고 있었다. 밀착된 그녀의 몸은 무척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나를 원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오전만 해도 나는 이 만남을 귀찮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사실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만나 커피를 사주고 시간이 된다면 간단하게 저녁을 함께 하고 적당한 때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것이 친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에 해야 할 작업도 남아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희재는, 갑자기 ' 그 그림 '을 언급했다. 우물을 이야기 하였고 우물 안에 빠져들어가는 꿈을 꾼다고 했다. 그 우물의 깊이는 형언할 수 없을만큼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희재는 자신이 그 그림에 선택되었다고 말했다. 붙들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를 찾아냈다.


희재와 자기 전, 난 잠시 수연을 떠올렸다. 오늘 처음 본 여자와 약속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행동이 평소의 나의 성향으로 볼 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마도 그녀가 ' 그 그림 '을 언급하면서부터 우리는 이렇게 연결되도록 예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수연에 대한 생각도, 그림에 대한 생각도. 그때의 기억도.


나는 눈을 감고, 오로지 우물 속에 잠겨 들어간 존재에 대한 생각만 했다. 끝이 없는 우물의 바닥을 생각했다. 하염없이 내리는 하얀 색의 눈, 그 광경을 살펴보는 눈 안으로 빠져들어가던 아름다운 눈송이들, 주변은 지나치게 조용하고 모든 것은 마멸되며 고요해진다. 나는 닳아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공허함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의 빈 공간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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