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랑 무조건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
그 기억은 어느 한 때로 이어진다. 꿈속에서 나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수연과 함께 카페에서 루이보스티를 마시고 있었다. 정오가 넘어간 시각, 우리는 아마도 오전 수업을 듣고 공강이 되어 하릴없이 카페에 나와 있었던 것 같다. 그곳은 5개 정도의 테이블이 있는 작은 카페였다. 마침 창문을 통해 빛이 멀리서부터 들어왔다. 한낮의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우리 말고는 3명 정도가 카페에 앉아 있었는데, 대부분은 그 나른한 빛에 취한 듯이 조용했다.
수연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다음, 청무가 들어간 샐러드를 시켜서 호밀빵과 함께 먹고 있었다. 그녀는 몸에 붙는 하얀 니트에 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양상추를 포크에 찍어 입에 넣고, 차를 함께 마신다. 한 번 접힌 니트 사이로 날씬하고 하얀 손목이 보였다. 그 카페에서 그녀는 늘 같은 샐러드를 시켰다. ' 나는 새로운 음식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어 ㅡ , 이 카페에 오면 늘 이 샐러드가 생각나. ' 수연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언제나 비슷한 음식을 시켜 먹었다. 마시는 차도 늘 루이보스티로 정해져 있다. 산미가 없는 커피를 좋아하고, 소설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많은, 시끌벅적한 곳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 익숙한 사람들만 만나고 새로운 만남은 잘하지 않는다.
수연은 그때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제 수업이 끝난 후, 잘 모르는 남자에게 사귀자는 고백을 받았다고 한다. 항상 앉는 자리에 캔커피나 두유가 놓여있어서 누구인가 싶었는데, 그렇게까지 친하지 않던 선배가 '만나보고 싶다'는 쪽지를 남겼다고 했다. 쪽지에는 이름이 적히지 않아서 처음에는 누가 보낸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연은 그 지점에서부터 조금 짜증이 나 있었다. 의사표현을 한다면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크게 관심이 없었어.라고 그녀는 말했다.
쪽지의 주인공은 가끔 만나서 인사만 했던 같은 과 선배였다. 수연은 그를 '안경을 쓰고 키가 컸던 선배'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꽤 오래전부터 수연을 좋아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쪽지를 보낸 하루 뒤 독서실에 앉아 있던 수연에게 쭈뼛거리며 다가와 한참을 시간을 끌더니(말을 하던 도중 그는 자신이 쓰고 있던 안경테를 올려 수연을 지그시 쳐다보기도 했다), 귀를 가까이 대어야 겨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지금 만나는 사람이 없다면 자기와 만나자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만나자고 말하는 방식이 너무 일방적이지 않아? '
수연은 청무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면서 말했다.
' 나는 그 사람을 전혀 모르는데, 내가 왜 그 사람을 만나야 할까? '
' 글쎄 ㅡ , 그 사람은 널 좋아했다고 하니까 만나보고 싶은 것이겠지. '
' 그렇다면 나도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
' 음.. 이제부터 알아가자는 거지. '
라는 나의 말에 수연은 얼굴을 찡그리며, ' 내가 왜 ㅡ? '라고 되받아쳤다. 내가 왜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 사람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니까, 그는 아마도 그렇게 너랑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었던 걸 거야. '
그녀는 내 말을 들으며 세상에서 가장 맛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호밀빵을 먹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녀에게 가지는 호감이나 또는 앞으로의 시간을 같이 보내자는 메시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살아 숨 쉬는 것, 납득되는 이야기, 자신의 마음을 뛰게 하는 것. 하지만 무엇이든 막상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가까이 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꽤 오랜 시간을 거쳐 신중함을 지닌 공백을 가지고 그 이후 안전한 만남만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 안녕, 수연아. '
블루는 수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부드러워서 수연은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눈은 그녀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따뜻함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에 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었다.
조용히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리고 있다. 세상에 없는 검은 강의 바다 위에서, 그녀는 최초로 누군가와 지근거리에 앉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이 많은 것들을 압축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그녀는 마치 처음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양수라는 안전한 공간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눈을 뜬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런 기분일까. 그녀는 이상하게도 위와 가슴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블루는 조용히 수연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무척 친밀하고 따듯한 행동이었다.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수연은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날 어떻게 아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위와 가슴으로 뜨거워지던 그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은 얼굴을 타고 올라와 뜨거운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그녀는 왜 자신이 울고 있는지 몰랐지만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또 이상하게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블루에게 부끄럽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이 그칠 때까지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지나치게 혼자 있었다는 사실을. 소중한 마음을 동결한 채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 숨겨지고 망각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 긴 시간의 터울을 지나 블루가 자신의 본질적인 부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흐트러지고 따뜻해졌던 것이다.
' 왜? '
울고 있던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오려던 블루의 손을 제지하며, 수연은 물었다. ' 당신은 누구야? '
수연이 앉아 있던 검은 강의 바닷물은 철썩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앉아 있던 그녀의 종아리를 넘어 하얀 기포를 내며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블루는 그녀의 바로 옆까지 다가와 왼쪽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채 방금 전까지 쓰다듬었던 그녀의 머리 위로 오른손을 떼고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 나는 너를 만나러 왔어. '
블루는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화이트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블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선은 그녀가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 둘 작정인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블루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깊은 애정 말고는 어떤 생각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한 움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연은 자신에게 차오른 벅찬 감정이 눈물이 되어 떨어지고 조금 진정이 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시간의 개념이 없는 공간이다. 얼마나 시간을 쓰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잦아들자 수연은 천천히 일어섰고, 앉아 있는 블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수연도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려는 지도. 블루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바람대로 일어섰다.
그는 키가 컸다. 수연보다 적어도 20센티는 더 키가 커 보였다. 단단한 손은 그 안에 힘차게 뛰고 있는 생생한 피를 증명이라도 하듯 따뜻했으나 전체적으로 몸은 마른 편이다. 하지만 큰 키와 다부진 몸 때문인지 전혀 왜소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어서서 손을 계속 잡은 채로, 천천히 검은 강의 바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예의 그렇듯이 검은 강의 바다를 걸을 때처럼, 어디선가 노랫소리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무척 시원한 바람이었다. 그들은 마치 태초에 함께 태어난 남매와 같이 당연한 듯 함께 바람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은 짙은 남청색으로, 지평선 끝은 보라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문득 하늘을 보니 전에 없던 옅은 구름들이 애벌레들의 마디처럼 수도 없이 이어져 내렸다. 그 덕에 조각상 같은 손톱달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 너의 이야기를 해줘. '
침묵을 깬 것은 수연이었다. 그녀는 블루의 따뜻한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크게 상관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그가 어떻게 이곳에 왔으며 자신을 만나게 되었는지 조금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블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그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조금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일 듯 말듯한 미소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블루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오래전, 너가 이곳 우물에 들어오기 전 우리는 내내 함께였어. 우리는 고등학교 때 만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나는 주로 너의 집으로 갔었지. 우리는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어. 너의 집은 낮은 담쟁이넝쿨이 있는 2층 가옥이었는데, 그 2층에는 오래되고 낡은 피아노가 놓여 있었어. '
블루에게 수연은 처음 사귄 여자친구였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단 한 번도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만난 수연을 처음 본 순간부터 왜인지 눈이 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친해졌다. 어떻게 그렇게 여자와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 스스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그녀의 사슴같이 선한 눈과 살풋 웃을 때마다 보이는 작은 보조개를 좋아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날, 블루는 그녀에게 책을 한 권 선물했다. 인도의 구도자 오쇼 라즈니쉬의 책이었다. 라즈니쉬라는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충실한 그의 말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글들은 독립적인 그녀와 어울리기도 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받은 책을 읽고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있던 칼 융의 책을 선물했다. ' 나 정말 감동했어. '라고 수연은 말했다. 너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놀라워. 우리가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어.
수연은 또래의 여학생들과 달리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주로 사색에 잠겨 혼자 산책을 다녔다. 필요할 때면 친구들과 어울려 주말에는 옷을 사러 가거나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생각을 공유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블루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그 둘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이 점차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부딪힘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당시 수연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그녀의 할머니는 블루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밖에서 만나는 것보다 블루가 수연의 집으로 찾아오는 것을 반겼고, 블루도 그런 수연의 집이 불편하지 않았다. 수연의 할머니는 수연이 블루와 친하게 되면서 훨씬 더 밝고 긍정적으로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 수연아,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 '
어느 날, 수연의 집에서 그가 물었다. 그들은 당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 삶이라는 것은 유한해. 무엇을 하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이 나에게 가장 가치로운 것인지 모르겠어. ' 수연은 두 손을 포개고, 창 밖의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 하지만 나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에 가깝다고 생각해. 만약 가능하다면 말이야. '
그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블루의 눈은 늘 바람이 불고 지나간 듯 조용한 수평선이 있었다. 그곳은 어쩌면 누군가는 영원히 닿을 수 없고, 어떤 이는 완전히 갇혀버릴 수도 있을 평온함이 있었다. 그 단단한 안정감이 늘 수연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블루는 그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말했다.
' 수연아, 나는 너랑 같이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우리는 아직 어리지만, 나는 그냥 느낄 수 있어. 나는 너랑 무조건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야. 그냥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기분이 들어. '
그날은 무척 특별한 날이었다. 블루는 왜인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날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들이 온다.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 없겠다는 본능적인 느낌, 실마리와 같은 것. 블루에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만약 수연과 헤어지면 나는 그 누구도 제대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지독한 괴로움에 휩싸여 언제까지고 과거를 그리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삶에서 완전한 인연을 만나는 것은 우주적인 일이다. 그런데 블루는 이미 만나버린 것이다.
그는 명확하게 그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