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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 Jan 27. 2022

매 순간 불안한 모든 이들에게 쓰는 글

[속초 한달살기] D.20

“아, 지금 나는 불안하구나.”


그렇다. 나는 지금 불안하다. 극도의 불안함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고 있는 지금 이 불안이 나를 삼키지 않을까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거멓게 타들어간 모든 정신을 겁내고 있다. 풀어진 이야기들을 자리에 앉아 차분히 바라보아야 하는 독자인 내가 너무 깊게 글씨로 만난 책의 주인공인 나에게 공감해 눈물을 쏟아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다. 분노에 에워싸여 하마터면 조용히 기회를 노리던 분노에게 기회를 줄 뻔했을 만큼 많은 빈틈을 가지고 있다. 시간에 대한 극복, 의지에 대한 극복, 생과 그것의 유지, 자유에 대한 극복 등 모든 종류의 극복이 보이지도 않는 나약한 존재 앞에 우두커니 선 철탑이 되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꽤나 잘 극복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은 다시금 내게 이런 시련을 주었다. 나의 의지와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맹목적인 충성을 기대하는 누군가를 앞에 두고 나는 나의 의지가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모든 성장은 고통의 씨앗을 시작으로 자라났기에 적지 않은 발전에 대한 기대 또한 들어찼다. 걷고 또 걸었던 길 위에 어느덧 성장의 그림자는 조금씩 옅어져 내리쬐는 태양 아래 자취를 감추고 있는 듯했으나, 그 성장의 채도를 가린 것은 다름이 아닌 눈이 부셔 세상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나의 어리석은 눈동자였음을 깨달았다. 길어지고 짧아지면서도 한순간도 나를 떠난 적 없는 이 그림자는 오늘도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내가 걸음 하여 자신의 몸집을 키워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분기점에 가까워질수록 성장이 더뎌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분기점을 지나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전력 질주할 때에는 성장에 가속도가 붙는 것은 우리가 지닌 그림자와 너무도 닮아있다. 빛이 쏟아져오는 곳에 다가갈수록 짧아지고 멀어질수록 길어지는, 그러나 모두가 나의 모습인 그림자. 그렇기에 나는 이번 조명을 지나며 다시금 길어질 그림자를 기대할 수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작지만 강단 있는 희망이었다.


허나 꼭두새벽 밤을 지새우며 곤두선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쏟아내는 이 글 위 나는 불안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 우리가 낭떠러지로 밀려나는 시점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과 죽는다는 것에 대한 자각,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에 대한 인지와 관련된 수만 가지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처럼, 나 또한 인생의 단순한 경험 하나를 계기로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따지며 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게 도움이 될까?’, ‘이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하는 생각들의 꿈틀거림은 눈보라 치는 시베리아에서 나침반도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한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 이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에 도달하고자 하는지를 잊은지는 오래, 단순히 빛이 있는 곳으로, 생명의 기운과 온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가기만을 희망하는 절박한 심정의 울부짖음에 불과했고 이렇게 내 안의 나에게 침식당한 영혼은 스스로를 구제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을 요구했다.


차가운 시베리아의 환경에서 나는 우두커니 서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더는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똑바로 서 바람의 방향과 손의 떨림을 느낄 용기를 가져야 했다. 나는 바람이 내는 소음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오히려 최고의 고요함이 된 허허벌판에서 눈을 감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훌쩍이는 어린아이가 웅얼거리는 단어들을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열정과 증명 그리고 의지, 가능성에 대한 나만의 주관적인 상상들은 저마다 따로 날개를 펼쳐 정신의 이곳저곳에서 날고 있었으며 웅크린 아이는 어느 것을 따라가야 할지 혼란에 빠져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내 바깥의 것들에 현혹되어 길을 잃은 내면의 아이와 내 안의 것들을 모두 쏟아내다 길을 잃은 바깥의 나, 안타깝게도 우린 같은 사람이었다. 어린아이인 나는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모두를 쟁취하기 위해 한꺼번에 내가 가진 것들을 전부 쏟아내려 해 오히려 아직은 담지 못할 그릇임을 깨달았고, 어른이 된 나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뜀박질해 궁극적인 나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두 자아의 존재를 깨달은 나는 모든 시간을 멈추고 두 사람의 만남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들이 허물없이 서로의 품에 안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린 모든 것의 연결을, 진정한 세상에서의 살아감을 경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순응과 저항, 나는 이 간극 사이에서 꽤나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주입시킨 환각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동시에 그 환각이 주는 편안함의 유혹이 너무도 강해 양쪽 모두에게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어떤 식으로 안정성을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변모했고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추구해왔던 것들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했다. 나의 가치관과 철학은 나와 세상에 의해 매일같이 처참히 짓밟혔고, 밟힌 다음에는 더욱 굳어져 재기했다. 하루는 잠에서 깨면 어느 때보다 개운하고 말끔하게 떨어지는 태양 아래서 춤을 출 수 있었고, 하루는 눈을 뜨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하루 안에서도 파편처럼 나누어진 감정들은 제멋대로 이리저리 날아가다 꽂혀 피를 흘리게 만들었고 하나 둘 생긴 상처는 내가 채 치료도 하기 전에 몰래 곪아가고 있었다. 간신히 치유한 한두 개의 상처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직까지도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흉이 지고 있었고 안타까운 마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던 나는 더 많은 것을 손에서 놓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의 중력에 다시 한번 작아지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모든 감각을 편안하고 둔감하게 만들어주던 착각들에서 벗어났을 때 금단현상으로 이전의 느끼던 일반적인 감각들이 극도로 예민하고 날카롭게 다가오는 것처럼 나에게 지금 세상의 모든 현상은 (하물며 그 무게가 깃털보다 가볍다 할지라도) 나를 짓누르는 돌덩이처럼 느껴진다. 조금씩 짓눌리는 기분에 숨통이 조여 오지만 아등바등 벗어나려고 해도 체력만 빠질 뿐 진전은 없는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력을 다해 이 무게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찾아내고,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온 한두 가지의 소일거리들에 눈이 멀어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면서 말이다. 물론 효과는 미미했지만.


이렇게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을 맛본 후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나의 목숨을 위협할 것처럼 느껴지는 이 무게들이 사실은 원래부터 나와 함께 살아온 존재라는 것을. 이것들은 나를 고통스럽게도, 두렵게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날아가지 않고 땅에 붙어있을 수 있게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행복이라는 무게였을까. 아니면 실패라는 무게였을까. 어떤 이름을 달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은 언제나 손을 붙잡고 서로에게 웃음 짓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내가 깨달았다는 사실이었으니까.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들 투성이지만, 나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고통이 잔존하는 시간은 조금 더 짧아졌고 단단하게 나를 묶던 고통의 사슬들은 조금 더 헐거워졌다. 과거라는 닿지 못할 환상과 미래라는 허황된 꿈 사이에서 나는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잘못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야 할 시간은 지금이었다. 유일하게 채색되지 않은 백색의 공간인 ‘지금’. 움직이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매캐하게 잠긴 공기를 마시면서 꿈속을 유영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나를 구원해 주지 못한다. ‘현재’에서 쓰레기 더미에 갇힌 ‘제2의 우주’ 속 부자와도 같은 모습이다. 이런 추악한 변명들이 나를 추격하지 못하도록 나는 더욱 최선을 다해 달려보기로 한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을 향해서. 그 길 가운데 내 그림자는 길고 짧아지며 매 순간 나에게 다른 밀도의 기대를 선물하겠지만 그것들마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하고 친근해질 것이니.


결국 삶이다. 땅으로부터 잉태해 땅으로부터 먹잇감을 선물 받고 땅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 나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것으로 나만의 것을 만들다 죽기 전에 손가락으로 글자 몇 자를 축축한 토양에 기록하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 것. 결국 삶이다. 모든 것을 헷갈려하며 평생을 살아왔지만 결국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모든 결박을 풀어헤치고 자유를 바라본 나의 눈이 흘린 눈물은 그걸 의미했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삶을 택한 나의 노여움이 사그라들 때쯤 알아낸 것, 결국 모든 것은 삶일 뿐이었다는 것. 옳고 그름과 높고 낮음의 기준 바깥에서 생명의 의미를 탐닉하던 나의 모습이 결국 완전함의 상징이었고 그것으로 삶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두 절벽을 잇는 가느다란 실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나, 추락의 공포와 생존의 환희를 동시에 느끼며 한 발짝씩 나아가는 나는 이미 삶과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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