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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 Mar 03. 2022

쌓인 눈에 새겨진 첫 발자국

   "일어나!"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애타게 사람들을 깨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눈이 번쩍 뜨였다. 


   "일어나! 밖에 눈이 온단 말이야!"


   그 말을 듣자 묘한 설렘이 가득 퍼지는 게 느껴졌고 나는 곧바로 이불을 걷어차고 마루로 나갔다. 이미 가족들은 전부 마루에 모여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이미 발목까지 쌓여 있었고 어제만 해도 앙상했던 나뭇가지들은 하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눈이 날아다니는 궤도에 한참을 빠져있던 그때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돌이 지나 걸음마를 뗀 조카였다. 가족들은 조카가 처음으로 눈을 보는 거라고 알려주었다. 조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괴상한 점들을 보며 두려운 듯 휙 고개를 돌린 채로 할머니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우린 그런 조카를 달래기 위해 눈이 무섭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 애썼다. 나와 동생은 쌓인 눈 위로 뛰어들어 눈뭉치를 던지며 놀았고 할아버지는 그중에 하나를 조카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들의 모습에 조금은 안정이 되었는지 조카는 이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눈뭉치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 차례 자신을 내려달라는 강력한 표시를 한 뒤에 조심스럽게 쌓인 눈밭에 다가갔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잘 걷지도 못하는 걸음으로 탁 하고 새하얀 눈 위에 첫발을 내디뎠다. 조심스럽게 한 발, 두 발 조카는 마루 밑으로 내려와 아무도 걷지 않은 곳에 자신의 발자국을 새롭게 새겼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손을 눈에 찍어보기도 하고, 엉덩이로 앉아보기도 하면서 조카는 마음껏 첫눈을 즐겼다. 행복해 보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삶에 하나 적립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처마 밑에서 조카를 바라보다 나에게 말을 건넸다. 


   "저 아기의 모습이 꼭 너와 비슷하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아이를 봐. 처음 보는 것에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다가도 이내 호기심으로 변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것을 온전히 즐기기 시작하지 않니. 그러고 나면 다시 돌아오기 싫을 만큼 빠져들게 되기도 하지. 너도 그렇지 않니?"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늘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점들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고 그것들이 쌓여 자기가 알고 있던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 나타나는 걸 보는 건 꽤나 충격적인 일일 거야. 그렇기 때문에 저 아이에게 처음 보는 눈은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지만 자신의 힘으로 눈을 밟아보기로 결정한 뒤에는... 저것 좀 봐. 우리 중 그 누구보다 해맑은 표정으로 세상을 만끽하고 있지 않니. 

   처음에는 '이 눈을 밟으면 아래 무서운 뭔가가 있지는 않을까', '미끄러져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그만큼 재밌는 게 없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계속 거기에 빠지게 되고 눈이 다 녹아 없어진 뒤에도 눈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

   네 모습도 마찬가지야. 선례가 없는 길,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그걸 마주한 뒤 너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이내 네가 처음으로 그 길에 발자국을 남기기로 마음먹었고 그 뒤로는 쭉 새롭게 길을 개척해내고 있잖아.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 빠져서 말이야.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앞으로 그런 경험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쿵쾅 뛰며 설레는 마음으로 그 길을 선택하게 돼. 우리가 지금까지도 눈이 온 아침이면 빠르게 나가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야."


   "맞아요! 저도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걷는 게 좋아 지금의 삶을 살기로 다짐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사실 최근에는 이 길을 가는 게 맞는 건가 생각이 들어요. 돌아보면 제 발자국밖에 없고 앞을 보면 새하얀 공허함밖에 없는 느낌이랄까요. 설레는 마음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어요. 이제는 두려움이 그 열정을 덮으려고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지금도 우리는 눈 위를 걸을 때면 조심하지 않니. 발을 잘못 디뎠다가 푹 빠져서 다치지는 않을까, 눈 아래 깔린 얼음장에 미끄러져 상처를 입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하지.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걱정들이 머릿속에서 희미해질 만큼 새로운 눈 위를 걷는 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알아. 두려움을 이기고 올라간 세상이 얼마나 눈부신 지를 아는 거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한번 만끽했기 때문에 모두가 밟아 흙탕물이 된 땅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걸 수도 있어. 

   고민이 많겠지만 너는 이미 알고 있어. 네가 가는 길이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너한테 어떤 아름다움을 주는지. 앞에는 새하얀 공허밖에 없고 뒤로는 네 발자국밖에 보이지 않아 두렵다고 했지? 그 공허함은 네가 처음으로 개척해나갈 세상이 될 거야. 평범한 우리가 특별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 그리고 네가 그곳으로 한발 한발 전진하면 그걸 보던 또 다른 사람들도 네 뒤를 따라 걸음 하게 될 거고. 만약 네가 지금 가는 길이 의심이 된다면 네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한번 더 떠올려 봐. 그럼 네 앞에 놓인 공허가 따뜻한 반짝임으로 바뀔지도 몰라."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떨어지는 눈과 걸었던 발자국이 이미 덮여 다시 새하얘진 바닥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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