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숲 속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그들은 활활 불타는 초록빛 화염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다.
세 편의 연작 중 ‘나무 불꽃’의 결말을 둥글게 구부려 이야기의 시작과 맞닿는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영혜와 그녀를 돌보는 인혜를 먼저 등장시키면 의문은 증폭된다.
이들은 누구지? 무슨 이유로 산산이 해체된 비정상적인 삶을 자청하여 살고 있는 거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렴풋한 해답이라도 얻기 위해 과거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야 한다. 채식주의자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꿈을 꾸던 그날로 돌아간다.
새벽 4시, 캄캄한 부엌. 고기가 가득 찬 냉장고를 응시하는 영혜. 그녀를 몽유병처럼 바라보는 남편의 오싹한 시선. 귀기 어린 음울한 비극의 시작은 다음 영화 오프닝을 눈앞에 소환한다.
1. 'The night of the hunter' (Charles Laughton 감독, 1955년): 주택가와 인접한 숲길을 검은 자동차가 유유히 달린다. 운전석에 앉은 해리 포웰(로버트 미첨)은 말한다. “신이여, 어디로 갈까요? 말씀해주세요.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는 신의 이름 뒤에 숨어 잔혹한 범죄를 일삼는다.
2. ‘The shining' (Stanley Kubrick 감독, 1980년): 오버룩 호텔로 향하는 장대한 숲 속 도로를 가로지르는 자동차를 미지의 무언가가 따라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숲을 지키는 정령이 지옥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귀곡성이 메아리치는 숲을 빠져나온 잭 토랜스(잭 니콜슨)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광기에 휩싸인 채 그의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간다.
그들은 피조물로 가득한 자연을 꿈결처럼 몽롱하게 관통한다. 그들은 아낌없이 베풀고, 순수하게 희생하는 수목에게서 아무런 배움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날짐승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날 선 송곳니를 위협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영혜의 주변에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고, 난폭한 짐승들이 어슬렁거린다.
18년에 걸친 아버지의 폭력, 가족들의 무관심, 사회적 성공과 안정을 위해 규범에 따르기를 강요하는 남편.
평범한 딸과 아내였던 그녀는 어느 날 꿈속에서 어두운 숲 속을 헤매고, 시뻘건 핏물이 떨어지는 날고기로 가득한 세계를 목격한다. 질긴 고기를 씹다 혀를 깨물 때처럼, 불현듯 과거의 이미지가 핏물처럼 고인다.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중략)
일곱 바퀴째 나타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축 늘어진 녀석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를 보고 있어. “
(채식주의자, 52~53 page)
짐승들은 채식주의자를 자신들의 세계로 받아들일 수 없다. 탐욕으로 가득 찬 세계가 그녀가 지닌 순수함으로 정화되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막연히 의미 있으리라 여겼던, 성공하리라 예상되었던, 모든 것을 얻으리라 추측되던 자의식이 무의미함, 공허함, 순결함으로 침식당할 때 그들은 분노하고, 대상을 학대한다.
학연, 지연, 혈연, 취향 등 동질성을 공유하는 집단에 이질적인 누군가가 스며들 때 또 다른 영혜가 살아남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다수가 휘두르는 무자비한 폭력과 의도적인 무관심에 절벽 끝으로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상처받은 그녀는 또 다른 연약한 피식자에게 폭력을 물려줄지도 모른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 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채식주의자, 65 page)
아름다움이 탄생하기 이전의 ‘아름다움’이 존재할까? 아름다움에 ‘등급’을 매길 수 있다면?
미(美)를 지닌 대상이 숭배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처제의 육체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만약 그가 쇠락한 예술가라면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은 어떻게 분출될 것인가?
‘몽고반점’의 존재 자체가 숨겨졌다면 위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인간의 호기심과 집착은 표면에 은밀하게 새겨진 비밀을 드러내도록 강요한다.
순수한 아름다움은 만개하다가 찰나에 시드는 꽃처럼 빛을 잃고, 급속도로 타락하기 쉽다. 인혜가 영혜의 몽고반점을 발설한 것은 사그라진 예술가의 심장에 ‘보고 싶다’는 욕망의 불씨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영감과 상상력을 제공했다.
인간의 삶은 어디로 뻗어 나갈지 모르는 뾰족한 가시나무처럼 탄생부터 비극적 결말을 예고하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몽고반점이 존재하지 않고 소멸되었다면, 순수함을 지향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영혜와 그 존재를 목도하고, 자신의 영혼을 육체 위에 새겨놓은 접목椄木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아내를 기만하고, 처제를 이용했다.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간 악인으로 평가하고 매장하는 사회적 기준과 완벽한 예술작품을 향한 탐미주의의 완성.
둘 중 어느 쪽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결정적으로 그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조하지 못했다. 그녀와 하룻밤 접하여 동물적 쾌락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한 차원 높은 예술적 희열은 얻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구급대원이 들이닥치기 전, 아니 그보다 앞서 인혜가 현장을 목격하기 이전에 그는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함으로써 작품을 완성했어야 한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색(色)에 사로잡혀 도약하지 못함으로써 비극적 결말을 내려다보는 십자가에 제물처럼 못 박힐 수밖에 없었다.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었던 절벽 끝에서 시선을 돌린 예술가의 날개는 꺾여버렸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잠적했지만 에로틱한 탐미주의를 작품뿐만 아니라 삶에서 실천한 작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너를 완벽히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온 영혼을 이 문신 속에 새겼다. 이제 남자란 남자는 모두 너의 먹이가 될 것이다.” (<문신>, 다니자키 준이치로)
영혜는 모든 나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동조하여 식물화되는 과정을 겪는다. 채식주의자가 되기 이전, 탐욕에 찌든 몸과 마음의 독소를 제거하는 처절한 과정. 인혜 뿐만 아니라 지옥도와 같은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우리가 보기에도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인공적인 피 냄새가 맺힌 음식을 거부하고, 뿌리내리고 잎을 피우기 위해 물구나무를 서는 그녀는 고행을 떠난 수도승 그 자체다. 자신이 고통스럽더라도 결코 타인을 위해하지 않는, 폭력적인 현실 속에 자신의 육체가 날 선 뾰족함을 지니는 것을 항시 경계하는 자세를 부디 본받으라. 수도승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타락한 현재에 안주할 수 없다. 그들은 떠나야만 한다. 단단히 뿌리내리고 줄기를 힘차게 뻗어 올려 무성한 가지 여기저기에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울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바다처럼 넘실대는 어머니의 품으로.
평소와 다름없는 새벽. 도로 양 옆의 나무들이 덮쳐 올 듯 쏟아지는 숲 속을 드라이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