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개다가 원피스 옆구리가 터진 걸 발견했다. 패턴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입던 원피스였는데, 이제 보내줄 때가 되었나 보다. 구멍 난 부분을 기워서 조금 더 입을까 하다가 그동안 여름마다 매주 매주 빨아 4-5년을 입었으니 지금 보내주어도 호상인 것 같아 기워입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옆구리 터진 원피스는 잘 개어 남은 빨래를 개는 동안 잠깐 옆에 미뤄두었는데, 빨래를 다 개고 돌아보니 여전히 패턴이 참 예뻐서 버리기에는 아쉬웠다.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문득 거실 소파가 눈에 들어와서 쿠션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옷으로는 더 이상 못 입어도 천으로는 쓸 수 있으니까. 천이라고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보면 되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쿠션 말고는 좋은 아이템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손바느질로 쿠션을 만들자니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손수건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의견을 듣고 나니 머릿속에 반짝! 하고 필요한 물건이 생각났다.
커피머신을 사용하다 보면 반드시 행주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런데 우리 집 행주는 모두 흰색이라, 커피머신에 사용하다가 색이 물들어 얼룩덜룩해진 행주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진한 색상의 행주를 사려고 했었는데 마침 원피스 원단이 리넨이니 머신용 행주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토요일 낮, 난데없는 베란다 공방이 시작되었다.
팔자에도 없는 주말근무를 하게된 바느질 도구들
바느질을 마지막으로 했던 게 언제였더라? 확실한 건 최근 3년 동안에 단 한 번도 바늘을 잡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바느질 도구도 대학생 때인가 다이소에서 사놓고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셰어하우스와 원룸과 아파트를 전전하는 동안 늘 한편에서 나와 함께 했다.
요약하자면 나는 바느질을 거의 해보지 않았고, 바느질 솜씨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스스로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헤어지기 싫은 옷과 다시 같이 살아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바느질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지쳐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것 같아 간격을 매우 넓게 잡았다. 첫 술에 배부르려고 촘촘하고 꼼꼼하게 하다 보면 결국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그만둘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하는 일을 할 때에는 조금 스스로에게 관대해도 괜찮다. 우선 시작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보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바느질이 엉성해서 오래 쓰지 못한다면, '이번엔 실수했으니 다음번엔 좀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지!' 하고 넘어가면 된다. 내가 힘들지 않아야 다음번이라는 기회가 생긴다.
시행착오를 거치는 중
왼쪽 끝까지 바느질을 했는데도 실이 많이 남았기에, 실이 끝날 때까지 오른쪽으로 다시 기워서 마무리를 했더니 결국 한 부분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이렇게 한번 해보고 나니 한 방향이 끝나면 거기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과 실을 당겨줄 때에는 반대쪽 끝 매듭을 손으로 눌러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망설임 없이 실을 모두 풀어 다시 처음부터 하기로 했다. 깨달은 게 있으니 이제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 거의 완성한 상황에서 이렇게 면이 울었으면 다시 시작하기 막막했을 텐데 그래도 첫 번째에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생각보다 바느질은 금방 되었다. 한 땀 한 땀 하지 않고 바늘을 아래위로 요리조리 움직여 마치 어묵 꼬지 만들듯이 해서 실을 쭉 뽑아내니 대여섯 번 만에 한 면이 완성되었다.
시침질을 하지 않고 한 면만 보면서 바느질을 했더니 뒷면의 바느질은 삐뚤빼뚤했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다. 나는 앞을 보면서 간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서 남은 발자국을 보면 갈팡질팡 엉망이다. 그래도 계속 앞으로 가다 보면 결국 어딘가에는 다다르기 마련이다. 한때 원피스였던 행주도 그렇게 완성이 되었다.
다 만들고 나서 보니 도마에 괴어두는 행주로도 좋을 것 같아 하나를 더 만들기로 했다. 초록과 분홍의 체크 패턴이 우리 집 주방과 잘 어울려 주말의 한 때를 여기에 투자한 것이 아깝지 않았다.
정강이까지 오는 긴 원피스여서 행주 두 개를 만들고도 천이 많이 남았다. 컵홀더, 티코스터, 헤어 스크런치 등등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얻어두었기에 앞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조금씩 만들어보기로 했다.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은 원피스와 또 한 번 새로운 형태로 같이 할 수 있어 기쁘다. 아직 충분히 천으로써 쓰일 수 있는데 다른 쓰레기들과 섞여 버려지기엔 너무 아깝다. 사람도, 물건도 제 쓰임을 다한 것 같아도 돌아보면 거기 쓰일만한 곳들이 있다. 시험을 포기하고 인생을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내가 우연히 적성에 맞는 일터를 찾아 일하게 된 것처럼! 물론 지금은 퇴사하고 싶지만ㅋㅋ
제로 웨이스트를 생각하고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이것도 어쩌면 제로 웨이스트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록 나는 아직 플라스틱과 비닐을 놓지 못한 사람이라 웨이스트가 제로는 될 수 없겠지만. 한 번에 모든 걸 다 해낼 수는 없으니 이렇게 좋아하는 옷을 다시 사용하는 것들부터 조금씩 시작해보는 것도 괜찮지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