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사 Mar 08. 2024

 5시간 동안의 결혼식

    

결국 결혼식은 3월 초 서울에서 하게 되었는데  X의 친척들은 예식 하루 전에 대절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호텔에 묵으며 밤새 우리에게 음식을 날라서 돌리게 했다. 남들은 결혼식 전날 마사지를 받거나 미장원을 간다는데 나와 X는 머리에서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다가 새벽 2시에 집에 들어갔다.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결혼식 당일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1시간 정도 야외사진 촬영을 하고 식장으로 갔다. 외국에 살고 있던 언니, 형부, 조카도 오고, 지영이가 미국 유학 중인 탓에 지영이 어머님께서 대신 와주셨다. 당시 민경이도 이태리에 살고 있어서 나의 절친들은 나의 눈물의 결혼식을 보지 못했다. 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폐백이 문제였다.     


폐백을 하고 친척들에게 절을 하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대략 150명 정도에게 절을 하고 나니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와 X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울면서 절을 하는 내게 친구는 ‘너 여기서 울면 시어머니한테 나중에 험 잡힌다. 조금만 버텨.’‘나도 이렇게 절 많이 하는 결혼식은 첨 본다’

이쯤 되면 아마 절값이라고 두둑이 챙겼으리라 생각하실 텐데...


X의 엄마는 친척들에게 며느리에게 나중에 한꺼번에 전달해 줄 거라면서 미리 다 걷어서 본인이 챙기고 내게는 ‘갱상도는 절값이 없데이’라고 했다.


 친척에게 절까지 끝내고 나니 4시가 넘었다. 5시간동안 결혼식에 우린 너무 지치고 허기져있었다.  결혼식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친정 부모님들도 뵙지 못해서 배고픔도 잊고 친정 친척들과 지인들이 피로연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가보니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2시간 전에 끝나고 모두 가셨다는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남들도 이러면서 결혼하는 걸까? 그렇게 활짝 웃으면서 결혼하는 친구들도 사실은 이런 어려움을 숨기고 결혼식을 했던 걸까?     


울면서 친정집에 갔지만 친정 부모님들을 계시지 않았다. 외국사는 언니네가 바로 출국해야 해서 공항으로 배웅하러 가신 거였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엉엉 울어서 눈에서는 검은 눈물이 흘러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X의 위로를 받으며 신혼여행지인 설악산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푸껫이나 하와이로 간다곤 했는데 그런 것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돈이 없어서 지인의 콘도를 빌리고 돈 한 푼 없이 출발해서 X는 집에 전화를 해서 본인 이름으로 들어온 부조금과 절값은 내놓으라고 싸웠지만, 결국 우리가 받은 것은 50만 원이었고 그 돈으로 척산온천에서 온천하고 회를 사 먹고 자전거를 타면서 그렇게 3일간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엄마 시절에 택시 타고 남산타워 다녀오고,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간다고 하셨다는데 1994년 나는 그 시절에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지만, 아쉽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이니 돈이 없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X가 나를 사랑하고 나 역시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에 차 있었다. 내가 열심히 잘 살면 X의 부모도 노여움이 사라질 것이고 손주를 낳으면 충분히 상황이 바뀌리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밝고 긍정적이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었기에, 내가 지금 내린 사랑이라는 선택도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착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힘든 결혼 준비나 결혼식의 불합리한 행태나 초라한 신혼여행도 다 나중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X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도 없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와 결혼을 결심하면서 첫사랑에 대해서는 잊었고 안 좋게 헤어져서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면서 결혼하기까진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힘들지 않게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그의 사탕발림이 나에게는 통했다.


나는 연애 경험이 여러 번 있었지만, 헤어지면 더 이상 다시 생각해 본 적 없었을 뿐 아니라, 결혼을 결심하면서 X 이외의 옛 기억은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래야 하는 게 상도의에 맞는 거니까. 최소한!!!


X는 자기가 돈 많이 벌면 좋은 곳으로 신혼여행을 다시 가자며 나를 위로했지만, 초라한 신혼여행에서도 나는 슬프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기에 그곳이 낡은 콘도에 온천이라 해도 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좋았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식은 X의 부조금과 나의 절값은 받아보지도 못하고 사라졌고 우리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우리의 하루하루가 너무 즐겁고 행복했기에 궁핍한 생활에서도 참 많이 웃고 즐거웠다. X는 늘 이렇게 말했다.


“우린 둘 다 능력이 있으니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거야. 조금만 고생하자!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사랑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많이 많이~~~”     


나의 생각은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라지만, 나를 사랑해 주고 소중히 아껴주는 X 때문에 배가 불렀고 마음이 벅차게 기뻤다. 내가 기름통을 들고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나는 결혼을 결심하면서 유학과 결혼 중에서 선택해야 할 때, 기준은 내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기로 했다. X와 결혼에 최선을 다해보고 후회가 없을 때까지 노력해 보고, 내가 버티지 못할 때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선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새로운 선택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고, X가 그런 날 속이는 기간이 렇게 길게 될지 몰랐다. 그래서 X의 불륜을 확인하자마자, 아무런 미련도 없이 집을 나오고 고민 없이 바로 이혼을 결정할 수 있었다. 내겐 1도 미련이 없었다.


나를 막대하는 시부모의 학대와 돈에 대한 요구에도 참을 수 있는 건 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는데 X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나는 그의 옆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가 나를 정말 사랑했을까? 하는 의심이 끊이지 않지만, 이제 그마저도 중요하지 않다.


 시부모에 대한 학대를 버티는 나를 보면서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듣지 못한 걸 보면 그의 사랑은 그때도 나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전 07화 혼자 준비하는 결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